편집자주
어렵고 낯선 과학책을 수다 떨 듯 쉽고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읽어본다, SF’를 썼던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모나코’ ‘방콕’처럼 제목만 들어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을 써온 작가 김기창이 최근에 펴낸 소설집의 제목은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민음사)이다. 이 책은 훗날 한국 문학사에 남을 가능성이 크다. 한 작가가 비유가 아니라, 진짜 ‘기후 위기’가 촉발한 인간사에 초점을 맞춰 쓴 열 편의 소설을 모은 최초의 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을 꺼내놓고 보니 이상하지 않은가? 21세기 인류가 맞닥뜨린 가장 심각한 위기, 심지어 인간종의 절멸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는 기후 위기가 얘기된 지 30년이 넘었다. 하지만 한국 문단은 물론이고 전 세계로 시야를 넓혀봐도 문학 작품 가운데 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한 것은 손으로 꼽는다.
국내에 번역이 안 된 소설 가운데 킴 스탠리 로빈슨의 ‘뉴욕 2140(New York 2140)’ 같은 걸출한 작품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런 소설은 어김없이 SF로 분류된다. SF에 대한 주류 문단이나 문학 독자의 편견을 염두에 두면, 과학자 다수가 30년이 넘도록 ‘진행 중인 현실’이라고 목소리 높이는 일을 정작 문학은 ‘현실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니까 “문학 창작 영역에서 기후 위기는 마치 외계인이나 행성 간 여행 비슷한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인도와 미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 아미타브 고시의 ‘대혼란의 시대’(에코리브르)는 바로 이런 상황이 발생한 원인을 집요하게 묻는다. 지금, 문학 더 나아가 예술은 왜 기후 위기를 외면하게 되었을까.
사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분노의 포도’로 유명한 존 스타인벡의 소설만 하더라도 등장인물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힘은 모래 폭풍 같은 자연재해였다. 스타인벡은 그런 자연재해와 사회의 불평등이 만나서 소작농 같은 하층 계급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하지만 어느새 이런 작품은 ‘고발 문학’으로 폄훼되기 일쑤다.
저자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 기체가 치솟기 시작한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세계사와 문학사를 두루 살핀다. 그는 지난 200년간 특히 문학에서 ‘자연’과 계급, 계층 혹은 인류 같은 ‘전체로서의 인간’이 배제된 사실을 발견한다. 대신 그 자리는 먹고살 만한 중산층 개인의 내면 묘사가 차지했다.
이렇게 자연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는 경향은 상상력의 영역을 넘어서 우리의 삶 속에도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 저자는 뉴욕, 보스턴, 홍콩, 뭄바이, 콜카타처럼 산업화와 함께 번성한 식민지 도시가 하나같이 자연재해에 취약한 사방에 노출된 바닷가에 건설된 사실도 짚는다. 그 도시의 계획자들은 태풍, 허리케인, 사이클론이 도시를 덮칠 가능성을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에서 성장기를 보낸 저자가 보여주는 경계인의 시각은 책 읽는 재미를 더한다. 예를 들어 지금 군부의 시민 학살로 전 세계의 비판을 받는 미얀마(버마)는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전 세계에서 석유 생산이 가장 활발한 나라였다. 하지만 1885년 영국 제국이 버마를 합병하면서 석유로 근대화를 시도하던 이 나라의 몸부림은 실패로 끝났다.
지금 세계 석유 산업을 쥐락펴락하는 다국적 기업 BP의 전신이 바로 미얀마의 석유를 꿀꺽하고 나서 영국 제국이 세운 ‘버마-셸(Burmah-Shell)’이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영국을 비롯한 산업화에 앞장선 제국주의 열강은 식민지에서 화석 연료(석탄, 석유)에 기반을 둔 탄소 경제가 싹트는 일을 막았다. 세계 불평등이 역설적으로 지구 환경에는 도움이 된 불편한 진실!
세계의 주목할 만한 작가를 꼽으면 빠지지 않은 아미타브 고시는 대표작 ‘유리 궁전’(2000) 외에는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없다. 이 소설은 1885년 영국의 버마 점령부터 1996년 미얀마 군부 독재 치하에서 가택 연금 중인 아웅산 수치의 집 앞 연설 장면에 이르기까지의 110여 년 동남아시아 역사를 담았다. 지금 읽으면 딱 좋을 책인데, 안타깝게도 절판 상태다.
과학책 초심자 권유 지수: ★★★★ (별 다섯 개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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