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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은 재난을 먹잇감 삼아 어떻게 배를 불려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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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은 재난을 먹잇감 삼아 어떻게 배를 불려왔나

입력
2021.05.20 15:5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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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인도양 쓰나미로 부모를 잃은 한 스리랑카 소녀가 무너진 건물 더미에 앉아 망가진 인형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칼무나이=로이터 연합뉴스

2004년 인도양 쓰나미로 부모를 잃은 한 스리랑카 소녀가 무너진 건물 더미에 앉아 망가진 인형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칼무나이=로이터 연합뉴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1944~2015)은 저서 ‘위험사회’에서 “빈곤은 위계적이나, 스모그는 민주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당장 우리가 목도한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의 위험은 민주적이지 않았고, 위계적으로 배분됐다. 재난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가난하고 힘 없는 약자들에게 재난은 더 가혹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재난 앞에서 웃는 자들이 있다. 바로 시장이다. 정확히 말하면 신자유주의가 이끄는 기업과 그 추종자들이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는 세계적 환경운동가이자 진보 사상가인 나오미 클라인이 2007년 쓴 ‘쇼크 독트린: 자본주의 재앙의 도래’의 최신 버전이다. 마지막 장에 클라인과 영국 가디언 편집장의 인터뷰가 새로 실렸다. 2008년 우리나라에도 초판이 번역돼 소개됐지만 절판됐다가 최근 팬데믹 시대 극복 방안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13년 만에 복간됐다. 그 사이 중고책 시장에선 정가보다 비싸게 팔릴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코로나가 불러온 역주행이다.

책은 2005년 미국 남동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폐허가 된 루이지애나주 재해 현장에서 시작된다. 한 개발업자는 신이 나서 말한다. “우리는 백지상태에서 새로 출발하게 됐어요. 큰 기회를 잡았죠.” 그에게 사람들의 절규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엄청난 비극을 보고 좋은 기회라니요! 장님들이거나 악마네요!”

2005년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피해를 입은 뉴올리언스 주민들이 건물 옥상에서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 뉴올리언스=AP 연합뉴스

2005년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피해를 입은 뉴올리언스 주민들이 건물 옥상에서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 뉴올리언스=AP 연합뉴스

재난은 당사자들에겐 절망이었지만, 시장에겐 기회이자 돈이다. 절망을 복구하는 과정 자체에서 수요는 창출되니까 말이다. 기업들이 재난을 틈타 공공 영역에 기습 침투해 사익을 추구하는 ‘재난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의 탄생이다. 책은 지난 50여 년간 벌어진 전 세계 재난 현장을 휩쓴 ‘재난자본주의의’ 민낯을 전한다.

신자유주의는 재난자본주의 설계자이자 가장 큰 수혜자였다. 저자는 시카고 학파를 이끄는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이 재난자본주의의 핵심 전략인 ‘충격과 공포’를 전파했다고 주장한다. 평상시라면 절대 불가한 일도, 극한의 위기 상황 속에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점을 파고든 것이다. 이른바 쇼크요법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 역사는 쇼크 독트린을 통해 쓰였다”고 일갈한다.

프리드먼이 가장 먼저 실험했던 국가는 1970년대 칠레 독재자 피노체트 정권이었다. 군부 쿠데타 충격에 극심한 인플레이션 공포까지 닥치자 칠레 정부는 시카고학파의 조언대로 전면적인 자유시장 프로그램을 이식해 경제 체질을 개조했다. 하지만 세금감면, 민영화, 탈규제화 등으로 발생하는 부작용의 고통은 온전히 칠레 국민들의 몫이었다.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진 '쇼크 독트린' 포스터. 출처 다음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진 '쇼크 독트린' 포스터. 출처 다음

칠레 말고도 쇼크 독트린이 적용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는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이 가져온 혼란과 민족주의적 흥분을 땔감 삼아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을 단숨에 진압했다. 국가를 취약하게 만드는 채무 위기도 빠지지 않는다. 1997~1998년 아시아의 경제위기로 휘청했던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 전쟁, 9·11 사태를 겪은 미국은 인명구조와 재건 분야까지 민영화하면서 ‘재난자본주의복합체’ 창설에 종잣돈을 대고, 가장 큰 고객으로 전락했다. 2004년 동남아를 초토화한 쓰나미 이후 스리랑카 어민들은 다국적 기업의 호텔리어들에게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해변을 내줘야 했다.

쿠데타, 전쟁, 테러, 자연재해 등 상황은 다르지만 재난을 먹잇감 삼아 국가와 개인들에게 잔인한 폭력과 억압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세를 넓혀온 전개방식은 동일하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나오미 클라인 지음·김소희 옮김·모비딕북스 발행·704쪽·2만8,000원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나오미 클라인 지음·김소희 옮김·모비딕북스 발행·704쪽·2만8,000원

‘충격과 공포’였던 책의 내용과 달리 마지막은 그래도 희망적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쇼크 독트린’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전하면서다. 자유 시장경제에 반발하는 중남미의 정치 권력, 쓰나미와 허리케인 등 자연재해의 피해를 주체적으로 복구하는 태국과 뉴올리언스 사람들의 모습에서 저자는 “스스로의 손으로 재해를 복구하는 사람만이 치유도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쇼크 독트린의 신봉자들 지갑만 채워주는 재난의 피해자로 남을 것인가, 좀 더 나은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재난의 복구자가 될 것인가. 재난이 휩쓸고 간 백지상태의 도화지는 신자유주의자에게만 주어진 선택지가 아니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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