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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에 돌아온 인디 가수 정차식 "이별과 불면의 시간들, 음악과 책으로 떠나보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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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에 돌아온 인디 가수 정차식 "이별과 불면의 시간들, 음악과 책으로 떠나보냈죠"

입력
2021.05.20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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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싱어송라이터 정차식은 "이별 후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다 제주에 내려가서 숙면의 행복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한진탁 인턴기자

인디 싱어송라이터 정차식은 "이별 후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다 제주에 내려가서 숙면의 행복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한진탁 인턴기자

마흔 넘어 찾아온 실연은 독했다. 외로움과 그리움 같은 증상은 차라리 가벼운 기침 수준이었다. 끈질긴 불면증과 표독한 악몽으로 끙끙 앓았다. 자책과 자학이 뒤엉켜 마음 곳곳에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부산 사내 정차식이 음악 활동을 하며 20년간 살았던 서울을 떠나 경기 평택으로, 다시 제주로 떠난 이유다. 실연에서 불면, 이주로 이어지는 격동의 중년사는 그에게 글을 쓰게 했고 노래를 만들게 했다. 6년 만의 앨범 ‘야간주행’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불면과 상실이 낳은 앨범과 책을 듣고 읽으며 유령처럼 어두운 얼굴을 상상했다. 금세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목소리로 ‘귀곡 메탈’이라는 새 장르를 개척한 레이니썬의 음악처럼. 레이니썬은 그가 이끌었던 1세대 인디 밴드다. 최근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그는 앨범의 스산한 기운을 배신하듯 쾌활한 부산 사투리로 인사했다. 제주에 내려간 뒤 거짓말처럼 건강을 되찾았고 수도권에 사는 새 여자친구와 장거리 연애를 하며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야간주행’은 한 권의 책과 여섯 곡의 음원으로 이뤄진 앨범이다. 별도로 판매 중인 책만으로도 ‘야간주행’이고, 음원으로만 발매된 음악만으로도 ‘야간주행’이지만 글과 음악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 앨범이 된다. 그는 앨범 소개 글에서 “무엇이 주인지 부인지 따져 묻는 게 싫어 그냥 두 개가 합쳐진 게 하나라 말하겠다”고 썼다. 책에는 이별과 불면, 악몽에 관해 그가 쓴 20여 편의 글이 담겼다. 이별 후 홀로 남은 중년 음악가의 회한에 찬 휑한 삶과 숯검정처럼 시커먼 악몽의 그림자가 알쏭달쏭한 문장 사이를 채운다.

230여 쪽의 책에 담긴 글보단 음악이 좀 더 생동감이 있다. 안전 속도 수준으로 주행하는 듯한 리듬감의 첫 두 곡이 그렇다. ‘나는 지금 생명이 없어 / 사랑 따윈 이젠 덧없어’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두 번째 날’과 “음반 전체의 정서를 대표하는 곡”이라 설명한 ‘빛나네’는 미드템포의 가벼운 비트로 달리면서 지나간 사랑에 쓸쓸히 안녕을 고한다. 앨범은 한기로 가득한 ‘품위 있게’ ‘눈사람’을 거쳐 음악극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아래로 갔다’에서 한바탕 절규를 터트린 뒤 듬성듬성 두드리는 피아노 타건 위로 마지막 바람을 전하는 ‘서약’으로 조용히 끝맺는다. 누군가는 청승맞다 할 수 있겠지만 진심이 담겨 있기에 절절히 가슴을 울린다.

정차식이 음원과 함께 내놓은 책 '야간주행'. 출판사 밤의출항 제공

정차식이 음원과 함께 내놓은 책 '야간주행'. 출판사 밤의출항 제공

'야간주행'은 헤어진 연인에게 마지막으로 선물하는 앨범이지만 한편으론 제주에서의 삶이 그에게 선물해준 앨범이기도 하다. 정차식이 처음으로 소속사 없이 혼자서 만든 앨범인데, 영화 연출을 하고 음악을 하는 제주 친구들이 품앗이처럼 도와줘 완성할 수 있었다.

정차식은 여행차 내려간 제주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숙면을 되찾았다고 했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공감대로 만난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새로운 행복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주까지 결심했다. “삶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오랫동안 드라마 음악 작곡가로 살아온 그는 서울에 있을 때만 해도 끙끙 앓으면서 먹고살 만큼만 힘을 내 작곡했지만, 이젠 틈틈이 수영하고 낚시하고 오토바이로 해변도로를 달리며 삶을 즐긴다. 고통스런 시절 만들었던 곡들이 조금이나마 밝아진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이전 앨범도 시대별로 내 삶을 정리하는 식이었는데 ‘야간주행’도 사진첩을 정리하듯 만들었다”고 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춰 헤어진 여자친구를 떠나 보내는 마음으로 만든 앨범”이라고도 설명했다.

정차식의 성대 혈관에는 술과 담배에 절여 숙성시킨 듯한 인생의 쓴맛이 흐른다. 그 목소리로 빚어낸 세 편의 수작 ‘황망한 사내’(2011) ‘격동하는 현재사’(2012) ‘집행자’(2015)를 냈다. ‘격동하는 현재사’는 2013년 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록 음반 등 2개 부문을 수상했다.

음악을 업으로 살아온 지 30년이 다 돼 가지만 전업 음악가로 사는 건 여전히 힘겹다. 그는 “1년에 드라마 서너 편, 편당 서른 곡 정도 만들고 나면 내 음악을 만들기는커녕 음악 듣는 것조차 싫어진다”며 한숨을 쉬었다. “드라마 음악을 만들면서 앨범을 내고 책까지 내야 했으니 무척 힘들었어요. 음악이란 늘 다수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늘 무명의 상태라는 게 힘이 빠지기도 하죠. 나이가 들면서 집중력도 떨어지는데 언제까지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탄탄한 지지층이 있어서 자기 하고 싶은 음악만 할 수 있는 게 제일 부럽죠. 하하”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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