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행 중 폭행엔 특가법 적용 등 처벌수위 강화 불구
기사 상대 폭력 기승 "코로나19로 더 빈발" 지적도
단발 정책에 그쳤던 보호격벽 설치 지원 확대 요구
서울에서 20년째 개인택시를 몰고 있는 오흥근(79)씨는 7년 전 취객에게 폭행당한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오씨는 그날 새벽 명동에서 50대 남성을 뒷좌석에 태웠다. 만취 상태였던 남성은 "(경기) 구리경찰서로 가자. 내가 아주 못된 짓을 저질렀는데 자수하러 간다"는 말을 시작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다가 30분 뒤 잠이 들었다.
오전 3시 넘어 목적지인 경찰서 앞에 도착한 오씨는 잠든 손님을 깨웠는데, 그때부터 남성은 오씨 얼굴과 몸을 주먹으로 수차례 가격했다. 다행히 근처 주유소 직원이 소란을 눈치채고 112에 신고해 큰 화는 면했지만, 그날의 기억은 오씨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러던 중 서울시가 2019년 택시기사 보호 격벽 설치를 지원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오씨는 그해 2월 운전석에 안전벽을 설치했다. 오씨는 "격벽 설치 이후 야간에 손님을 태워도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며 "설치 의무화와 함께 지원 사업이 확대돼 동료 기사들도 안전하게 운행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최근 승객이 택시기사를 폭행하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강력 사건이 잇따르면서 택시기사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운전자 폭행을 강력하게 처벌해달라는 요구와 함께 기사들을 보호할 수 있는 운전석 격벽 설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특가법 적용에도 기사 폭행 빈발
19일 경찰청에 따르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주행 중인 운전자를 폭행한 범죄는 2019년 2,587건에 달한다. 운전자 폭행에 대해 형법상 폭행이 아닌 특가법을 적용하는 이유는 2차 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경찰도 지난해 이용구 법무부 차관의 택시기사 폭행 사건을 계기로 운전 중 폭행에 대해 엄정 수사하고 있다. 이달 관악구 난곡터널 부근에서 발생한 택시기사 폭행 사건에서도 경찰은 가해자가 도로뿐 아니라 운행 중인 택시 안에서도 피해자를 폭행한 사실을 추가 확인, 특가법을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택시업계에선 특가법이 적용되지 않는 정차(일시정차 제외) 중 폭행이 적지 않을 뿐더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이후엔 마스크 착용 문제 등으로 폭행 위험이 더 커졌다고 말한다. 실제 피해를 당해도 단순 폭행으로 합의를 보고 고소를 취하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운행을 못하면 수입이 줄어드는 기사 입장에선 사건 처리나 송사에 휘말리는 게 부담이기 때문이다. 개인택시 기사 김모(61)씨는 "한번은 취객에게 맞아 경찰 조사를 받고 곧바로 다시 운행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택시도 버스처럼 격벽 의무 설치" 제안도
최근 경기 성남시에서 택시기사가 승객이 휘두른 흉기에 숨지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운전석 격벽 설치를 검토하는 기사들이 많아졌다. 25년째 택시 격벽을 전문적으로 설치해온 김영문 오늘종합상사 대표는 "택시기사 폭행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보호벽 설치를 문의하는 전화가 급증했다"며 "폴리카보네이트 소재 격벽은 망치로 쳐도 끄떡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격벽은 비말 차단 효과가 커서 코로나19 확산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택시 격벽 설치율은 아직 높지 않다. 지난해 기준 서울시에 등록된 택시 7만1,747대 가운데 격벽이 설치된 택시는 356대(0.5%)뿐이다. 이 중에서도 120대는 코로나19 입국자 전용 택시로, 운전자 보호가 아니라 비말 차단을 목적으로 설치됐다.
그간 여러 지자체에서 택시기사 보호용 격벽 설치를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했지만 대부분 단발성에 그쳤다. 경기도는 2015~17년 진행했던 관련 사업을 사실상 중단한 상황이다. 서울시는 "2024년까지 시내 모든 택시에 보호 격벽을 설치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2019년 시범사업을 진행했다가 1년 만에 중단했다.
택시업계에선 비용 부담과 함께 낮은 호응도를 격벽 확대의 걸림돌로 꼽는다. 운전석 전체를 감싸는 '일체형' 격벽이나 알루미늄 봉에 아크릴 판을 덧댄 격벽의 경우 기사들이 '휴식할 때 의자를 뒤로 젖힐 수 없다' '후진할 때 핸들 작동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에 기사 안전을 보장하면서 현장 의견도 반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격벽을 규격화하는 등 실효적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는 제작업체별로 얇은 아크릴부터 방탄 소재인 폴리카보네이트까지 다양한 소재를 쓰는 데다가 측면 및 후면 보호 가능 범위도 제각각이다. 강상욱 한국교통연구원 광역교통연구센터 명예연구위원은 “지자체들이 불만 사항을 파악해 격벽 종류 선택권을 기사에게 주는 등 절충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버스처럼 택시에도 보호 격벽 설치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택시는 승객에게 폭행을 당해도 기사 혼자 대응할 수밖에 없는 '밀실 구조'라는 점이 감안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시내버스의 경우 운전기사 폭행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2009년부터 보호벽 설치가 의무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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