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7일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 주점의 남녀 공용 화장실. 한 사람이 살해당했다. 이유는 단 하나. '여성'이어서다. 가해자는 화장실에서 기다리다 남성 7명은 그냥 보낸 끝에 여성을 골라 무참히 살해했다. 평소 여성이 본인을 무시하는 것에 화가 나서라고 했다. 명백한 '혐오 범죄'였다.
'강남역 사건'으로 한국 사회는 '혐오'와 '혐오 범죄'에 비로소 눈 떴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소수자·약자를 보호하고 혐오 범죄를 근절하겠다는 약속이 넘쳐났다. 그 후 5년. 혐오 범죄 대책 관련 논의는 얼마나 진전됐을까. 놀랍게도 '백지 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무엇이 혐오이고, 혐오 범죄가 무엇인지를 법·정책 개념으로 정리하는 작업조차 제자리걸음이다. 국회는 이번에도 입법기관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
"말로만 위로한 정치권...혐오범죄 논의 無"
사건 당시 정치권은 한목소리로 피해자를 애도하고 재발 방지책을 꺼내들었다. "강남역 10번 출구 벽면은 포스트잇으로 가득했습니다. '다음 생엔 부디 같이 남자로 태어나요' (어느 여성분이 쓰셨을 이런 글을 읽게 되는 현실이) 슬프고 미안합니다."(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책무. 범죄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사회적 구조에 소홀함이 없었는지 시행 과정 전반에 대한 면밀한 점검이 필요하다."(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 하지만 이들의 위로는 말뿐이었다.
강남역 사건 5주기를 맞은 17일, 정치권은 대체로 침묵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이날 논평으로도 강남역 5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낸 건 정의당뿐이었다.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는 "불법촬영, N번방, 정치권 성범죄 등 지난 5년간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의 민낯이 수없이 드러났다"며 "여성이라는 성별이 더 이상 한 사람의 삶에 공포와 절망, 차별의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호영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개인 차원에서 추모페이지에 글을 올려 "단지 여성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슬픔"이라며 "차별적이고 혐오적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도 "우리사회가 여성혐오를 정면으로 인식하게 만든 충격적 사건"이라며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다름을 혐오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추모페이지에 글을 남겼다. 상중인 정춘숙 민주당 의원도 "5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했나 돌아보게 된다"고 썼다.
'제2의 차별금지법' 항의에 부딪혀 철회된 '혐오범죄 방지법'
혐오범죄 방지를 위한 입법 시도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발의된 법안들은 허무한 이유로 철회되거나,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 못했다. 20대 국회 때인 2016년 12월 이종걸 당시 민주당 의원은 '증오범죄(혐오범죄)'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사와 분석을 통해 대책을 마련토록 하는 '증오범죄통계법'을 발의했다. 하지만 보수 개신교의 강력한 항의로 발의 10일 만에 철회됐다. 증오범죄를 단속하려다 동성애가 허용될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 때문이었다. 2018년 2월 발의된 혐오표현규제법안(김부겸 당시 민주당 의원 대표발의)도 같은 이유로 15일 만에 철회됐다.
혐오·차별을 목적으로 한 범죄를 가중 처벌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형법 일부개정안(강효상 당시 미래통합당 의원, 박광온 민주당 의원 각각 대표발의)'도 20대 국회에서 논의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해당 법안이 상정된 2017년 9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전체회의 속기록에 따르면, 의원들은 '혐오' '강남역' '차별'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논의를 시작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21대 국회에선 '혐오범죄 방지법'은 아직 발의되지 않았다.
"혐오는 다른 범죄와 구분해서 다뤄야...차별금지법부터 논의 필요"
전문가들은 '혐오와 차별'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고, 특정 집단에게 정신적 외상을 입힐 수 있어 다른 강력 범죄와 구분해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17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혐오 범죄에 대한 법이 있었다면, 강남역 사건은 조현병 환자의 범행이 아닌 여성 혐오 범죄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법이 만능은 아니지만, 이제는 혐오·차별에 대한 중장기적인 대책 마련을 위해 논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 차별금지법이 혐오·차별 대응 정책의 물꼬를 틀 수 있다고 했다. '너와 나의 차이가 차별로 변질돼선 안 된다'는 차별금지법의 취지가 편견과 혐오를 막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장도 "정치권이 '안티 페미' 논쟁이나 발화시키며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침묵하고 있는 것은 사회의 혐오 현상 확산을 부추기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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