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맞은 연극계 대모 박정자의 '해롤드와 모드'
연극 '해롤드와 모드'는 2012년까지 '19 그리고 80'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랐다.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두 주인공의 나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살을 꿈꾸는 19세 청년 해롤드와 세상을 달관한 채 매일 행복을 찾아 나서는 80세 할머니 모드가 등장한다. 그 누구로부터도 공감받지 못하던 해롤드는 쾌활한 모드를 만나 처음 마음을 열고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해롤드와 모드'가 컬트적인 작품이 된 이유다. 하지만 극은 극단적인 나이 차로 눈길을 끄는 연애물과는 거리가 멀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죽음에 대한 고찰을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로 뜨개질하듯 엮어낸다.
극에서는 모드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야기 구조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편이어서 배우의 연기가 작품성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해롤드와 모드'는 작가 콜린 히긴스의 시나리오를 통해 1971년 영화로 먼저 만들어졌고, 2년 뒤 연극으로 제작됐다. 한국에서는 1987년 배우 김혜자가 모드 역으로 초연했다. 이후 연극계 대모 박정자가 2003년부터 올해까지 전 시즌에 걸쳐 모드를 맡았다. 박정자는 첫 출연 당시 "여든 살까지 이 작품을 공연하고 싶다"며 "80세가 되는 날 나 역시 모드처럼 끝낼 수 있다면 아름다울 것"이라고 밝혔다. 박정자가 올해 여든을 맞으면서 그 소망은 실현됐다.
모드의 나이가 된 박정자는 무대 위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할머니 그 자체였다. 모드는 장례식장에서 땅콩을 집어 먹으며 사람들을 구경하는가 하면, 갑자기 "혈액순환에 좋다"며 태극권을 하는 엉뚱함을 보인다. 집에는 자신을 그린 기이한 누드화와 후각예술을 위한 '냄새 기계'가 있다. 쇼팽을 즐겨 듣는 예술 애호가이며, 히말라야를 등반하거나 우주비행사를 꿈꿨던 모험가이기도 하다. 모드의 독특함을 연기할 때마다 원로배우의 눈빛은 소녀처럼 빛났다. "모드가 삶의 롤모델"이었다는 박정자는 적어도 무대에서는 꿈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모드의 대사 하나하나가 모두 주옥같다. 모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편견에 맞서 주체적이다. "인생은 위대하고 단순한 변화의 과정"이기에 죽음도 관조로 대한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기 시작하는데, 죽음은 그냥 삶으로부터 크게 한 발 내닫는 일"이라고 말할 뿐이다. 실제로 모드는 살아온 날을 "참 아름다운 파티"로 기억하며 눈을 감는다. 해롤드에게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라"고 당부한다. "이 세상엔 더 이상 담이 필요 없고, (사람들을 이어줄) 다리를 더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던 모드다운 유언이다.
극이 끝나면 객석에 따스함이 가득 찬다. 동시에 이제는 박정자의 모드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대체 불가능한 배우의 열연은 23일까지 서울 대치동 KT&G상상마당 대치아트홀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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