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서핑보드가 잎새처럼 떠 있습니다. 작은 몸뚱이를 보드에 걸친 채 사람들은 망망대해를 바라봅니다. 잔잔한 물결 어딘가에서 파도가 일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지요. 복잡하고 언짢은 일상을 뒤로하고 파도에 몸을 맡긴 서퍼들, 바다 물결을 소리로 느끼며 파도를 기다리는 이 순간만큼은 '무아지경'에 빠집니다.
"내 인생에 파도가 좀 많아." 영화 '타짜'의 주인공 고니는 살면서 마주치는 온갖 시련과 그로 인해 빚어진 우여곡절을 '파도'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인생에서 파도를 반가워할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지난 12일 강원 양양 죽도해변에서 만난 서퍼들에게 파도는 한마디로 '전부'였습니다. 이들에게 어울리는 대사가 있다면, "내 인생에 파도가 많았으면 좋겠어"가 아닐까요.
'서퍼들의 성지'라는 죽도해변은 이미 여름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하나둘씩 모여들던 서퍼들이 이날 정오쯤에는 50명을 넘어섰습니다. 저마다 물 위에 보드를 띄우고는 페들링(보드 위에 엎드려 손으로 파도를 헤치는 동작)을 하며 바다로 나가 자신이 원하는 파도를 기다립니다. 어느 순간, 적당한 크기의 파도가 나타나면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워 파도 위로 올라타는 거죠. 기껏 해봐야 숙련된 사람이 10여 초, 초보자는 5초를 채 넘기지 못하고 물에 빠져버리지만 이들의 표정만은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합니다.
바다에도 흐르는 물길(조류)이 있는데 일정하지 않고, 강한 바람으로 인해 한순간에 파도가 급변하는(롤링) 탓에 서핑은 상당한 집중력과 순발력은 물론, 고난도의 숙련된 기술이 필수입니다. 파도의 방향과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물속에 처박혔다가도, 더 멋지게 파도를 타고 싶은 서퍼들은 곧바로 몸을 추슬러 있는 힘껏 페들링을 시작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생소했던 '보드의 물결'이 최근엔 국내에서도 흔합니다. 양양 죽도해변뿐 아니라 파도가 이는 곳이라면 계절을 막론하고 어디든 보드가 떠 있고, 서퍼들이 파도를 즐깁니다. ‘Ctrl+C(복사)’ ‘Ctrl+V(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서핑이 국내에 알려진 지는 2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일반인들이 본격적으로 서핑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10년 정도로, 서핑 종주국인 미국이나 유럽(100년)에 비하면 현저하게 짧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젊은 층 사이에서 마니아가 급증하는 추세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서핑에 미치게 만드는 걸까요.
양양에서 서핑 숍을 운영하는 최모씨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전체 관광객 수는 줄었지만 서핑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은 그전보다 오히려 15% 이상 늘었다”고 전했습니다. 바로, 한번 맛보면 잊을 수 없는 서핑의 매력 때문이죠. 그는 "초보자 때에는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 천천히 보드에서 일어나는 연습을 하는 동안 얼굴 전체에 짠 바닷물의 공격도 받고 거친 파도에 휘말리기 일쑤다. 하지만, 어느 순간 파도를 잡을 줄 알게 되면 보드가 미끄러지듯 나가면서 바다의 제일 높은 곳에 오른 듯한 짜릿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그때가 진정한 서핑의 매력을 경험하는 순간"이라고 귀띔해 줬습니다.
서퍼들 사이에서 'Life is a Wave'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험난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보드를 타고 순항과 좌초를 반복하는 모습이 우리 인생과도 같다는 의미겠지요. 그러니, 지금의 삶이 다소 힘겹게 느껴지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마세요. 언제든 파도를 제대로 잡아탄 서퍼처럼 우리 인생에도 화려하게 날아오를 순간이 올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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