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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에 담긴 삶의 지혜가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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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에 담긴 삶의 지혜가 책으로"

입력
2021.05.12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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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와 며느리의 특별한 이야기]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낙서장 모아 책으로 엮어

신무성씨가 아들 내외로부터 선물 받은 책 '여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재현 기자

신무성씨가 아들 내외로부터 선물 받은 책 '여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재현 기자

"틈날 때마다 달력 뒷면이나 연습장에 끄적거렸는데, 그걸 며느리가 책으로 묶었네요."

신무성(89)씨는 2년 전 며느리에게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자신이 쓴 시와 산문, 그리고 메모를 모아서 엮은 문집이었다. 책에는 신씨의 지난 삶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내용이 담겼다. 글을 쓸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의 가사나, 책의 문구, 사소한 생각 등을 충실하게 담았다.

초고를 모은 것은 며느리 김경도(55)씨. 김씨는 여느 때와 같이 집안일을 하다가 달력 뒷면에 정체 불명의 낙서를 발견했다. 시아버지의 메모라는 걸 알게 된 후 종이를 버리지 않고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책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몇 년이 지나고 꽤 많은 양의 낙서 종이가 모였다. 이 많은 시를 그냥 두기는 아깝다고 생각한 며느리는 책을 출판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구문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서경찰서 최덕기 경위의 도움을 받았다. 최 경위는 자료 수집부터 디자인 편집, 기획, 출판사 소개 등 전반에 걸쳐 도움을 줬다. 최 경위는 "처음 낙서를 봤을 너무 괜찮은 내용들이 많아 버리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신께서 쓰신 내용들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좋은 책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2018년 시어머니 김상숙(83)씨의 팔순 잔치에 맞춰 깜짝 선물로 시아버지에게 단행본을 선물했다. 책이 나오자 주변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아들 신종범(61)씨는 "자료를 한데 모아 정리해 책을 만든다는 것이 사실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었다"며 "하지만 책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책이 출판되자 신씨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신씨는 "낙서를 버리지 않고 잘 모아준 며느리에게 고맙고, 옆을 지켜준 아내에게도 너무 고마웠다"면서 "큰 내용도 아닌데 거창하게 책까지 내주니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했다"고 말했다.

"글을 쓰거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젊었을 적부터 소소하게 낙서하는 걸 좋아했어요. 공부도 하고 싶었지만 대신 책을 많이 보거나 하면서 삶을 달래곤 했죠."

신무성씨의 낙서 메모를 모아 만든 책 '여로' 속지. 김재현 기자

신무성씨의 낙서 메모를 모아 만든 책 '여로' 속지. 김재현 기자


신무성씨의 낙서 메모와 사진 등을 엮어 만든 책 '여로' 속지. 김재현 기자

신무성씨의 낙서 메모와 사진 등을 엮어 만든 책 '여로' 속지. 김재현 기자

책에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 이북에서 내려와 영월에 정착해 석탄 광업소에서 일한 신씨의 전력이 고스란이 드러나 있다. 책은 가족, 계사년 월기, 교훈, 노래, 인생 등 총 5개 테마로 구성돼 있다. ‘아범과 어멈 파이팅’, ‘여보 파이팅’, ‘할멈이 있으니 괜찮아 아직은 살 만하니까’ 등의 시에는 가족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겼다. 유머와 재치가 느껴지는 작품이 적지 않다. ‘된장의 오덕(5가지의 미)’, ‘폭주가들이 말하는 몸 버리는 음주법’이라는 시나 ‘몸을 상하게 하는 10가지 음주 습관’을 읽고 있으면 비시시 웃음이 비어져나온다. ‘천안함은 잠들다’, ‘잊을 수 없는 6.25’에는 1953년 포병 장교로 임관한 신씨의 이력과 시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당신은 조치원에서 태어나 해방 전 평안북도 수풍댐 인근에 이주해 살다가 6.25 직전에 월남했다. ‘인생의 세평은 두 번’에서는 ‘인간 후반생의 새로운 시작은 지금부터가 아닌가 하노라’에서는 나름의 인생관과 여생에 대한 각오를 담았다.

가족들의 지지와 응원 덕에 비슷한 나이대에서는 ‘청년’으로 통한다. 구순의 나이에도 면사무소에서 제공하는 노인일자리에 참여하고 있을 정도로 지역 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의 직함은 반장님이다. 신씨는 “면사무소 노인일자리 반장이 된지 벌써 5년이 됐다”며 “마음만은 젊은 청년이지만 힘에 부쳐 몸이 생각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라고 말했다.

아들 내외는 "시아버지가 여전히 시어머님께는 존댓말을 쓸 정도로 사람을 존중한다” 며 “그 모습을 통해 가족들도 배우는 점이 많다"고 말했다.

신씨는 지금도 낙서를 멈추지 않고 있다. 틈날 때마다 끄적이는 낙서는 며느리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의무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일 뿐인 거죠. 정신이 있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글을 쓸 거예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2번째 책이 나올 수도 있지도 않을까요?”

신무성(오른쪽 2번째)씨와 아내, 아들 내외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재현 기자

신무성(오른쪽 2번째)씨와 아내, 아들 내외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재현 기자

송민규·박은솔 대구한국일보 인턴기자

김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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