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업무인 검역 대신 3월부터 일손부족 작업에 투입
유족 등 대책위 "진상 규명·책임자 처벌 선행돼야"
경찰, 원청업체 관계자 등에 과실치사 적용 방침
지난달 경기 평택항 부두에서 화물 컨테이너 청소 작업 중 300㎏ 무게의 컨테이너 부품에 깔려 숨진 하청 노동자 이선호(23)씨. 아버지 이재훈(62)씨를 비롯한 유족은 아들을 보내지 못한 채 보름째 빈소를 지키고 있다. 유족과 민주노총 평택안성지부 등으로 구성된 ‘고(故) 이선호군 산재사망사고 대책위원회’는 이번 사고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우선돼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경찰은 과실치사 혐의 적용에 무게를 두고 원청업체 관계자들을 소환 조사할 방침이다.
쓰러진 300㎏ 날개에 참사
7일 대책위에 따르면 이선호씨는 하청업체 소속으로 동방이 평택항에서 운영하는 하역장에서 일용직으로 1년가량 일해왔다. 사고는 지난달 22일 오후 4시 10분쯤 발생했다. 이씨는 개방형 컨테이너(FRC)에서 나무합판 조각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을 하다가 '날개'라 불리는 컨테이너 부품에 깔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FRC는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화물을 싣고 운반할 수 있게 설계된 컨테이너로, 뚜껑이 없고 앞뒷면을 받침대(날개)로 막아 화물을 고정한다. 날개는 강철 재질로, 하나의 무게가 300㎏에 달한다.
당시 이씨가 있던 FRC에서는 세워진 날개를 접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날개를 고정하는 안전핀을 제거하고 컨테이너 안쪽으로 접는 작업이다. 날개가 워낙 육중하다 보니 안전핀은 해머로 쳐서 뽑아야 하고 날개를 접을 땐 지게차로 밀어야 한다. 대책위에 따르면 양쪽 날개의 안전핀을 뽑은 상태에서 지게차가 한쪽 날개를 밀어 접는 순간 반대편 날개가 넘어지면서 그 밑에서 작업하던 이씨를 덮쳤다.
대책위 관계자는 "지게차 작업자가 반대편에서 나무 조각 등을 제거하고 있는 고인을 보지 못하고 날개 접기 작업을 하다가 사고가 난 것"이라며 "신호수가 한 명만 있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원청업체인 동방 측은 현장에 안전책임자가 배치됐지만 사고 당시 다른 컨테이너 작업을 관리 감독하고 있었다고 해명했다.
대책위는 근무 기간 내내 동식물 검역 작업에 종사했던 이씨를 회사 측이 갑자기 컨테이너 작업에 투입하면서 안전 조치를 소홀히 했다고 지적한다. 이씨는 올해 3월부터 본래 업무보다는 일손이 부족한 작업에 투입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대책위 관계자는 "고인은 작업 관련 안전 교육도 받지 못한 채 낯선 일에 투입됐고 사고 당시 안전모도 쓰지 않았다"며 "더욱이 FRC 날개 주변 나무합판 조각은 원래 청소하지 않는데 원청 직원이 두 차례나 작업을 지시해놓고 이제 와서 발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부터" 장례 미뤄
대책위는 사고 직후 회사의 대응 방식도 문제 삼고 있다. 특히 현장 책임자가 119 신고가 아니라 윗선 보고를 먼저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책위 관계자는 "119 신고가 사고 발생 10여 분 뒤인 오후 4시 20분쯤 이뤄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씨 부친 이재훈씨도 이날 본보와의 통화에서 "우리 아이가 철판에 깔려 죽어가는 순간에 회사 책임자라는 사람이 119가 아닌 윗선에 보고하고 있더라"고 주장했다.
119 상황실에 확인한 결과 이날 신고가 접수된 시간은 사고 발생 직후인 오후 4시 10분이었다. 다만 이 시간에 신고한 사람이 회사 관계자인지 현장의 다른 근로자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경기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당일 오후 4시 10분에 신고가 접수됐고 4시 12분에 구급차가 출동했다"며 "4시 22분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씨는) 이미 심정지 상태였다"고 말했다. 119 측이 112 상황실에 공조를 요청한 시간은 오후 4시 13분이었다.
대책위는 사고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이재훈씨는 “(회사 책임자를) 경찰에 고발할 것이며, 관리 감독을 부실하게 한 해수부 등 담당 공무원들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이선호씨 둘째 누나라고 밝힌 사람은 전날 온라인 커뮤니티에 쓴 글에서 "(동생이) 코로나 때문에 학교도 못 가고 제 용돈 자기가 벌려고 아르바이트했던 것"이라며 "동생은 악 소리도 못 내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목격자와 증인도 있는데 회사는 왜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느냐"고 질타했다.
사건을 수사 중인 평택경찰서는 안전모 착용 없이 이씨를 작업에 투입하는 등 과실이 드러난 만큼 원청업체 관계자 등에게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 소환 조사한다는 계획이다. 경찰 관계자는 “유족과 근로자 등에 대한 조사는 모두 마쳤고, 오늘(7일) 오후부터 원청 관계자들을 불러 조사할 계획”이라며 “당일 ‘안전모가 부족했다’는 근로자들의 진술을 확보한 만큼 혐의 적용에는 문제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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