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일.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모교인 와세다대 입학식에 축사를 하기 위해 나타났다. “문학의 작용 없이는 사회가 건강하게 나가지 못한다”는 그의 축사만큼이나 화제가 된 것은 72세 하루키가 입학식에 신고 나타난 운동화였다. 검은색 학위 가운 아래 드러난 미색 바지와 낡은 운동화만으로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은 여느 패셔니스타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루키라면 얘기가 다르다.
하루키는 일본을 대표하는 노벨문학상 후보자이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이기도 하다. 때문에 재즈, 맥주, 위스키, 레코드, 자동차, 마라톤처럼 하루키가 좋아한 것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콘텐츠가 됐다. 이 목록에 하루키가 좋아한 ‘티셔츠’도 추가됐다.
최근 출간된 ‘무라카미 T’는 제목 그대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장한 수백 장의 티셔츠가 주인공인 에세이다. 일본의 남성 패션 잡지 ‘뽀빠이’에 일년 반 동안 연재됐던 것을 엮은 책으로, 현지에서는 출간되자마자 에세이 분야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하루키 취향 에세이’의 여전한 저력을 과시했다.
물론 이 수백 장의 티셔츠를 하루키가 작심하고 모은 것은 아니다. “값싸고 재미있는 티셔츠가 눈에 띄면 이내 사게 된” 결과, 각종 홍보용 티셔츠, 마라톤 완주 기념 티셔츠(하루키는 잘 알려진 달리기 예찬론자다), 여행지에서 사 모은 티셔츠가 컬렉션을 이루게 됐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사들이지도 않는다. 각각의 티셔츠 모두 하루키의 취향이 십분 반영돼 있다. 예를 들어, 서핑을 좋아해서 롱보드 제작자 이름이 적힌 티셔츠를, 맥주를 좋아해서 하이네켄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자동차를 좋아해서 폭스바겐 자동차가 그려진 티셔츠를 모으는 식이다. 하루키의 티셔츠는 사실상 그가 좋아하는 것들의 전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중에서 하루키가 가장 아끼는 티셔츠는 무엇일까? 바로 ‘TONY TAKITANI’ 티셔츠다. 하루키가 마우이 섬 시골 마을 자선 매장에서 발견해 단돈 1달러에 산 이 티셔츠는 훗날 그가 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됐고,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하루키의 표현처럼 "인생에서 단연코 최고의 투자"인 셈이다.
티셔츠에 얽힌 후일담만으로도 이토록 능청스럽고 유쾌한 에세이를 줄줄이 엮어내는 데서는 ‘과연 하루키’라는 감탄이 나온다. “마음에 들어 하는 낡은 티셔츠를 펼쳐놓은 뒤 사진을 찍고 거기에 관해 짧은 글을 쓴 것뿐이어서, 이런 책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면서도, “소설가 한 명이 일상에서 이런 간편한 옷을 입고 속 편하게 생활했구나 하는 것을 알리는, 후세를 위한 풍속 자료”라고 능청을 떠는 작가를 보고 있자면 왜 소설만큼이나 '하루키 에세이'의 팬이 많은지 이해할 수 있다.
티셔츠를 향한 하루키의 이 같은 애정이 통한 것일까,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는 3월 아예 하루키와 협업해 티셔츠를 제작했다. ‘노르웨이의 숲’, ‘댄스 댄스 댄스’, ‘해변의 카프카’, ‘1Q84’ 등 하루키의 대표작 속 세계관을 셔츠로 만든 것이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 디자인에 영감을 줄 정도로 여전히 ‘힙한’ 노작가를 가진 것이 잠깐 부러워지려던 찰나, 온라인 패션 플랫폼 ‘지그재그’ 모델로 발탁된 우리의 윤여정 배우가 떠올랐다. 그러니 출판계는 ‘무라카미 T’를 위협할 ‘윤여정 T’를 어서 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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