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은 할리우드 변화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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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은 할리우드 변화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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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2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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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역사 들춘 넷플릭스 드라마 '오, 할리우드'

편집자주

주말 짬내서 영화나 드라마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나 드라마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와 드라마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옛 것이 퇴출되고 새 것이 유입됐죠. 산업이 젊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현실이죠.

영화 ‘아티스트’ 속 페피의 대사

요즘 할리우드에선 흑인 각본가와 아시아계 감독, 배우 배우의 조합이 낯설지 않습니다. 1940년대 할리우드에서도 과연 가능했을까요.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오, 할리우드'. 넷플릭스 제공

지난 26일 배우 윤여정(74)이 제93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한국 영화 역사 10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시아 여배우로서는 두 번째 수상이었습니다.

봉준호 감독 말처럼 오스카가 원래 ‘로컬’로 미국 영화인들을 위한 잔치였으니까 그동안 한국 배우가 후보에 들 기회조차 당연히 없었겠죠. 게다가 오스카는 오랫동안 백인 남성이 주도한 행사였습니다. 한국인이 수상은커녕 후보로 거론되는 것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난해 ‘기생충’이 4관왕(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차지하자 마자 올해 윤여정이 여우조연상 트로피까지 한국으로 가져오게 된 건 세계 영화사 측면에서 봐도 의미가 남다릅니다.

오스카만 백인 위주였던 건 아닙니다. 할리우드 자체가 백인들만의 세계였던 적이 있습니다. 흑인과 아시아인은 오래도록 배척 당했습니다. 이들은 주연은커녕 아예 출연 기회 잡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게이 등 성소수자는 성정체성을 철저히 감추고 활동해야 했던 시절이었죠.

넷플릭스 7부작 드라마 ‘오, 할리우드’에는 유색인종을 배격하고 성소수자를 박대했던 할리우드의 인습이 잘 묘사돼 있습니다. 드라마는 194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합니다. 실존 인물과 가상 인물을 뒤섞어 당대의 분위기를 되살린 동시에 당시에는 꿈꾸기 힘들었던 일들이 이뤄지는 과정을 극적으로 표현해냅니다. 일종의 대안 역사(Alternative History)물인 셈입니다.


①흑인 주연이 당연해 보이나요?

주요 등장인물은 잭(데이비드 코렌스웻)과 아치(제레미 포프), 로이(제이크 피킹), 레이먼드(대런 크리스), 카밀(로라 해리어)입니다. 이들은 모두 할리우드에서 성공하기 힘든 처지입니다. 잭은 막 제대한 배우 지망생인데, 연기 경력은커녕 연기를 배워본 적도 없습니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아치는 흑인인데다 게이입니다. 로이는 근사한 외모를 지녀 배우 꿈을 쉬 이룰 것 같으나 게이입니다. 레이먼드는 필리핀계 감독 지망생으로 쉬 환영 받지 못 합니다. 카밀은 배우를 꿈꾸나 흑인이기에 쉽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각자 넘어서야 할 허들이 높기는 하나 이들은 꿈을 향해 돌진합니다. 잭과 아치는 주유소 직원으로 가장한 채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갑니다. 잭은 대형 영화사 에이스 스튜디오 대표의 아내 아비스(패티 루폰)와 잠자리를 하며 기회를 잡으려 합니다. 아치는 매춘으로 우연히 만난 로이와 사랑을 키우며 시나리오 작업에 매진하고, 스튜디오는 그의 시나리오 ‘페그’에 관심을 보입니다. 레이먼드는 재능을 인정 받아 스튜디오로부터 ‘페그’의 연출 제안을 받게 됩니다. 카밀은 연인인 레이먼드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할 기회를 얻습니다.

실력과 노력만 있으면 다 될 것 같지만, 인습이 만들어낸 장벽은 높고 두텁습니다. 스튜디오는 아치의 이름을 크레딧에 올릴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흑인이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카밀의 출연 역시 반대에 부딪힙니다. 오디션에서 연기력을 인정 받지만 흑인이기에 주연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제기됩니다. 1930년대까진 흑인이 주류 할리우드 영화에 아예 출연하지 못 했으니 무리가 아닌 주장이긴 합니다.

1940년대 는 연기력이나 배역의 적합성보다 배우의 피부색깔이 중요했습니다. 넷플릭스 제공


'오, 할리우드'. 넷플릭스 제공



②커밍아웃은 꿈도 못 꾸던 시절

로이 역시 고군분투합니다. 로이의 외모를 눈 여겨 본 헨리 윌슨(짐 파슨스)은 매니저를 자처합니다. 할리우드 고위 인사들이 모인 파티에 함께 참석해 로이를 인사시키기도 합니다. 로이는 잘생긴 외모 덕분에 스튜디오 관계자들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예명 록 허드슨으로 활동하며 배역을 따낼 수 있게 됐으나 욕구불만은 남아있습니다. 헨리의 강요에 의해 성정체성을 감추고 이성애자인양 활동하는 상황이 못마땅합니다.

네, 맞습니다. 로이, 즉 록 허드슨(1925~1985)은 실존했던 유명 배우입니다. ‘자이언트’와 ‘바람에 쓴 편지’(1956)와 ‘무기여 잘 있거라’(1957) 등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의 매니저 역시 실제로 헨리 윌슨이었습니다. 지브롤터의 바위와 뉴욕 허드슨 강을 조합한, 남성적인 예명 록 허드슨을 만든 이는 헨리였습니다. 그는 허드슨의 사생활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게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금전적인 손해가 막대했기 때문입니다. 허드슨이 게이라는 소문이 나돌면 여배우와의 염문설을 언론에 흘려 역공세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허드슨은 에이즈로 사망하기 직전 병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이 게이였음을 밝혀 미국 사회에 충격과 감동을 전했습니다.

드라마에는 불운했던 실존 인물이 더 등장합니다. 레이먼드는 전설적인 중국계 배우 안나 메이 웡(1905~1961)을 캐스팅하고 싶어 합니다. 스튜디오는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합니다.

실제로 웡은 빼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에서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역은 주로 악녀였습니다. 백인 배우와의 키스 장면도 허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엔 다른 인종간 교제 자체가 금기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펄 벅의 동명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유명 영화 ‘대지’(1937)에 왕룽의 아내인 아란 역할로 나오고 싶었으나 백인 루이즈 라이너에게 밀려 출연이 불발됐습니다. 영화사는 단역을 제안했지만 웡은 거절했다고 합니다. 라이너는 아란 연기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가져갔습니다. 백인이 중국인을 연기해 상까지 받는 어이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오, 할리우드'에서는 아시아계 배우와 흑인 배우가 오스카 시상식장에 함께 등장합니다. 역사엔 없었던 일을 상상 해내며 드라마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넷플릭스 제공


'오, 할리우드'. 넷플릭스 제공


③투쟁과 연대가 인습을 철폐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건너 뛰고 싶으시면 ☞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드라마에서 소수자들은 연대합니다. 레이먼드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아치의 이름이 빠져서는 안 되고, 카밀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선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웡의 캐스팅 역시 강행합니다. 잭과 아치, 로이 등은 부족한 제작비를 충당하려 마음을 모읍니다.

스튜디오의 변호사와 이사들은 흑인과 아시아인이 참여한 영화 제작을 반대하는데, 혼수상태 남편을 대신해 회사를 경영하는 아비스가 레이먼드 등의 편에 섭니다. 아비스 역시 백인들의 반발, 특히 남부 지역에서 광범위한 보이코트가 있을 것을 우려합니다. 하지만 친구인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조언에 힘을 얻습니다. 아비스도 소수자로서의 아픔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배우였던 아비스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시기 설 자리가 좁아졌습니다. 유대인 특유의 말투(드라마에선 명시되지 않으나 이디시어로 추정됨) 때문에 영화 출연이 힘들어졌던 것이지요.

드라마는 변화를 위한 투쟁과 연대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합니다. 돌이켜보면 백인 남성 위주 오스카의 변화 역시 낡은 틀을 깨야 한다는 목소리가 모였기에 가능했습니다. 올해 ‘노매드랜드’의 클로이 자오 감독이 아시아 여성 최초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도, 스태프 전원이 흑인인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가 작품상 후보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투쟁과 연대의 결과물입니다.

할리우드는 종종 ‘꿈의 공장’으로 표현됩니다. 사람들에게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들을 빚어낸다는 뜻과 더불어 세상에 희망을 전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드라마에선 할리우드가 ‘드림랜드’로 수식됩니다. 누구나 성별이나 성적 취향, 얼굴 색깔 등에 구애 받지 않고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 드림랜드라고 생각합니다. 윤여정의 수상이 할리우드와 오스카의 변화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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