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명 허용 행사에 10만명 운집 추산
'인간 눈사태'로 45명 사망·150명 부상
섣부른 방역 해제 비판 여론 불거질 듯
감염병을 극복했다는 자신감이 독이 된 걸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창궐 후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규모로 열린 종교행사에서 40여명이 깔려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신에 대한 찬양으로 들떴던 성지는 순식간에 비명으로 가득 찬 ‘생지옥’이 됐다. 세계 1위 코로나19 백신 접종률 앞세워 방역 규제를 느슨하게 풀자마자 일어난 대형 인재(人災)였다.
30일(현지시간)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날 새벽 북부 갈릴리 지역 메론산에서 열린 유대교 성지순례 행사 ‘라그바오메르’에서 최소 45명이 숨지고 150명이 다쳤다. 부상자 중 6명은 중태, 18명은 중상이라 사망자가 더 늘어날 게 확실하다. 희생자 중에는 어린이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라그바오메르는 2세기 활동한 유대인 랍비 시몬 바 요차이의 사망을 기리는 축제로, 초정통파 유대인들이 모여 모닥불을 피워 놓고 기도를 올리는 행사다.
사고 직후 응급구조대가 급파돼 구조작업에 착수했고, 구급차 수십 대와 헬기 6대는 부지런히 사상자를 인근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하지만 휴대폰 이용자 폭증으로 통신 장애까지 생겨 생존자 소재 파악에 애를 먹어야 했다. 민간 응급의료 조직 ‘유나이티드 하찰라’ 라자르 하이먼 부대표는 “내가 경험한 최악의 비극”이라며 “응급의학계에 몸 담은 20여년간 이런 일은 처음 본다”고 비통해했다.
안타까운 피해를 떠나 이날 참사는 명백한 인재였다. 이스라엘 당국은 행사 수용 인원을 1만명으로 제한했지만, 이스라엘 전역에서 버스 650대가 이곳으로 향했다. 주최 측은 최소 5만명에서 많게는 10만명이 참가한 것으로 추산했다.
수용 능력의 최대 10배나 되는 인파가 몰렸는데, 사고가 안 나는 것이 더 이상했다. 사고 초기엔 행사장 스탠드 구조물이 하중을 견디지 못해 붕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게 사실이라도 끔찍한데 정부 기관과 현지 구조팀 조사 결과, 사람이 사람을 덮친 최악의 비극이었다. 금속 재질 바닥이 깔린 비좁고 경사진 통로가 일순간 순례객들로 가득 차자 일부가 떠밀려 넘어졌고, 그 여파로 사람들이 연달아 도미노처럼 미끄러지면서 압사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인간 눈사태를 보는 듯했다(뉴스사이트 와이넷)”는 개탄이 나올 정도였다. 한 생존자는 “내 위로 사람들이 잇달아 포개지면서 숨을 쉴 수 없었고, 내 아래에도 어린이가 깔려 있었다”고 참혹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온라인에 공개된 현장 영상은 위험천만했던 사고 당시를 그대로 증언한다. 행사장 스탠드를 빽빽하게 채운 신도들이 노래하면서 둥둥 뛰거나 좁은 통로에서 사람들이 뒤엉켜 이동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사고 뒤에도 신도 수천명이 경찰의 대피 명령을 거부하고 현장에 남아 행사를 강행하다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교통부는 신도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버스를 긴급 투입했으나, 귀가 행렬이 겹쳐 극심한 교통 혼잡까지 빚어졌다.
봉쇄 완화가 부른 참극이란 비판도 많다. 이스라엘은 코로나19 접종 완료 인구가 60%에 달하며 집단면역에 가까워지자 최근 통제 조치를 대부분 풀었다.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18일), 대중교통 수용인원 제한 삭제(29일) 조치가 순차적으로 적용됐다. 내달 6일부터는 실내 체육시설과 음식점 실내 좌석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라그바오메르 역시 코로나19 사태 후 처음으로 허가 받은 합법적 종교 행사였다.
정부 대응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스라엘 보건부는 코로나19 재확산을 경고하며 참석을 만류했지만, 마스크까지 벗으라고 한 마당에 5,000명의 경찰력으로 종교의 자유를 만끽하려는 열혈 신도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미국 CNN방송은 “지난해 라그바오메르도가 코로나19로 취소됐던 터라 당국은 올해는 행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상당한 압박을 받았다”고 전했다.
섣부른 방역 규제 해제와 관련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책임론도 거세질 전망이다. 이스라엘 공안부는 “행사 계획과 책임, 기반시설 등 전 과정을 독립적으로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법무부도 경찰의 과실 여부를 들여다 볼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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