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힘을 지닌 고아 소녀는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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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힘을 지닌 고아 소녀는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입력
2021.05.0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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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넷플릭스 '섀도우 앤 본'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그리샤버스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는 넷플릭스 '섀도우 앤 본'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상에서 고아 소녀인 알리나가 빛의 힘을 갖게 된 이후 세계를 구하는 여정을 그린다. 넷플릭스 제공

얼마 전, 미국이나 영국 작품 중에는 왜 부모가 없는 아이가 주인공인 경우가 많은 것일까 생각해 본 일이 있다. 지난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제작 시리즈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 중 하나일 '퀸스 갬빗'을 보면서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그래야만 성장과 구원의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펼쳐 보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보호하고 사랑해 줄 존재가 없다는 생애 첫 고난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괴롭힘과 학대의 공간인 고아원이나 친척 집에서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자신을 구원해 줄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퀸스 갬빗'에서는 천재적인 체스 재능이다. 이 계열의 서사 중 가장 유명한 작품에서는 이마에 번개무늬의 흉터가 있는 소년에게 마법 학교의 초대장이 도착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해리 포터’ 시리즈의 이야기다.

넷플릭스에서 지난달 23일 공개된 판타지 시리즈인 '섀도우 앤 본' 역시 비슷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보육원에 살고 있는 소녀와 소년은 따돌림 속에서도 서로만을 의지하며 지낸다. '너를 절대로 혼자 두지 않을 거야'라는 약속을 부모에게 전해듣는 대신 서로에게 건네며 성장한 이 두 사람 중, 세계를 바꾸고 구원할 능력과 운명을 가진 것은 소녀 쪽이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관의 판타지 원작 소설을 영상화했고 비슷한 배경의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해리 포터 시리즈와, 유럽을 배경으로 한 가상의 대륙에서 국가들 사이의 판타지 전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 HBO 시리즈 '왕좌의 게임'과 비교되곤 하지만, '섀도우 앤 본'은 여기서부터 자기의 길을 간다. 보육원에서 자랐으며 천대받는 혼혈 인종이기까지 한, 아무 존재도 아니었던 젊은 여성이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로.

판타지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세계관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는 마법과 괴물이 등장하는 데서 이미 고개를 흔들 수도 있지만, 여기 없는 세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그 안의 이야기를 만들고 향유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판타지 작품에서 재미와 의미를 건져내기 위해서는 세계관의 장벽부터 넘어야 한다. 한때 런던 킹스크로스역에 9와 4분의 3 승강장이 있다고 상상해본 일이 있다면 못할 것 없다.


'섀도우 앤 본'은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관, 유럽을 배경으로 한 가상의 대륙에서 국가 간 전쟁을 그린다는 점에서 '해리 포터' 시리즈나 '왕좌의 게임'과도 비교된다. 넷플릭스 제공

'섀도우 앤 본'의 세계관은 '그리샤버스'라고 불린다. 작품 속에서는 미세 과학이라고 표현하지만 마법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능력자들을 그리샤라고 부르고, 이들이 등장하는 세계(유니버스)라는 의미다. 배경이 되는 세계는 가상의 대륙으로, 주인공 알리나가 살고 있는 라브카 왕국을 여러 나라가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라브카의 복식이나 문화, 문자는 19세기 제정 러시아를 참고했으며, 주변국들 역시 다양한 나라를 상징한다. '섀도우 앤 본'을 차별화하는 또 하나의 핵심 설정은 라브카 왕국을 동서로 양분하고 있는 거대한 암흑의 장막이다. 이 장막 안에는 익룡과 흡사한 외양의 괴물 볼크라가 살고 있어 장막을 살아서 통과하는 일이 등장인물들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 세계의 궁극적인 통합과 구원이 이 장막을 없애는 일임은 물론이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선 서머너'라고 불린다. 빛을 다루는 힘을 가진 전설의 그리샤이다. 라브카의 적국인 슈한과의 혼혈인으로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던 지도 제작자 여성 알리나 스타코브(제시 메이 리)가 선 서머너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서 추앙받는 빛의 성인(聖人)이 된 젊은 여성은 이 무거운 운명을 피하고 싶다. 하지만 피할 수 있다면 운명이 아닌 법. '섀도우 앤 본'의 세계는 이 빛을 중심으로 돈다. 사랑도, 우정도, 질투도, 배신도, 비밀도 알리나의 인생에 휘몰아친다.


'섀도우 앤 본'은 판타지 액션 '로맨스' 드라마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넷플릭스 제공

'섀도우 앤 본'의 재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방대하고도 다양한 설정이 가득한 세계관을 파헤치는 재미도 있고 마법과 총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시대의 다양한 결투가 보여주는 액션도 호쾌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섀도우 앤 본'의 세계에서 장막의 존폐만큼이나 중요한 건 알리나가 평생을 함께해 온 소꿉친구 말(아치 르노)과 숙명의 파트너인 어둠의 그리샤 키리건 장군(벤 반스) 중 누구를 선택해 운명을 헤쳐나갈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판타지 액션 '로맨스' 드라마인 것이다.

세계를 구할 운명을 타고난 여성이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왜 이렇게까지 로맨스의 비중이 높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아쉽기도 하지만, 어차피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사랑과 전쟁'이 난무하는 와중에 세계의 이방인들이 모였고, 같은 편이 되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탄생한 구원자와 사랑 말고는 가진 능력이 없는 맨손의 파트너 곁에 선 사람들은 마법 대신 각자의 출중한 능력으로 무장한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양성애자다. 이 이야기는 결국 이방인들,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힘을 합쳐 증오와 불신의 장막을 걷어내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중의적인 의미의 판타지로서 '섀도우 앤 본'의 첫 시즌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문으로서의 역할을 다 한다.


제작진은 21세기에 걸맞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캐스팅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극중 동양인인 슈한인과 술리족을 향한 차별이 동양인에 대한 차별은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된다. 넷플릭스 제공

이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서 제작진들은 21세기에 걸맞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캐스팅에 심혈을 기울였다. '나니아 연대기'의 캐스피언 왕자였던 벤 반스를 제외한 나머지 주요 인물은 신인에 가까운 배우들이 맡아 연기했다. 그리샤버스를 창조해낸 원작자이자 넷플릭스 영상화에 프로듀서로도 참여한 작가 리 바두고가 인터뷰를 통해 언급했듯이, 혼혈로 설정된 알리나를 중국계 혼혈 영국인 배우인 제시 메이 리가 연기한 것은 당연하지만, 지금까지는 당연하지 않았었기에 의미 있는 성취다. 이외에도 다양한 인종의 배우가 출연하며, 주요 출연진 중 여성의 비중도 높은 편이다.

다만 동양인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원작에서 어떻게 묘사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영상화된 작품 안에서 드러나는 슈한인과 술리족을 향한 차별은 동양인 차별이다. 왜 가상의 세계에서조차 차별의 대상이 동양인이어야만 할까? 넷플릭스를 통해 이 작품을 보는 세계 각국의 시청자들은 슈한인이 동아시아 지역의 동양인이며 술리족이 인도, 파키스탄, 네팔 부근의 남아시아 동양인을 상징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지할 수 있다. 인지하면서도 왜 이들이 차별을 받는 쪽이라는 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이 차별의 구도가 현실과 닮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가 아닌 또 다른 세계에 빛과 어둠, 물과 불과 바람까지도 조종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다고 상상하면서도, 차별과 다름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는 현실의 인종차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현실의 차별을 인식하게 할까, 아니면 오히려 강화할까?


'섀도우 앤 본'은 차별을 보여주고, 다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재미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넷플릭스 제공

혈연의 양육자 없이 사회가 제공하는 보육 시설을 통해서 자라난 아이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다. 알리나에 대한 차별은 이중으로 존재한다. "보육원 냄새가 나는 잡종"을 향해 쏟아지는 차별과 멸시는 알리나가 가진 빛의 능력이 밝혀졌을 때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만든다. 이는 어쩌면 더 극단적인 권력과 힘과 계급의 격차에서 더 큰 관계의 긴장감이 만들어지는, 운명과 구원을 다루는 판타지라는 장르의 공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청자들 역시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공식을 계속 그대로 사용해도 괜찮은지,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다른 과정을 거쳐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섀도우 앤 본'은 차별을 보여주고, 다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재미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다름은 당연하고, 차별은 옳지 않으며, 차별받는 사람들에게도 빛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선명하고도 윤리적인 메시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는 차별의 재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섀도우 앤 본'의 원작은 3부로 구성되어 있고, 영상화된 첫 시즌은 그리샤 3부작의 1부와 크로 클럽의 크루 멤버들 이야기를 담은 또 다른 책을 엮은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좋은 평가와 사랑을 받고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읽고 본 수많은 어린이들이 호그와트 입학 통지서를 기다렸다면, 상징을 알고 상상할 수 있는 성인 시청자들은 '섀도우 앤 본'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시즌에는 더 나아간 세계를 보고 싶다. 보긴 할 거라는 이야기다.

윤이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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