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리의 엄마’에서 ‘배우 이향란’으로 “지금이 내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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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리의 엄마’에서 ‘배우 이향란’으로 “지금이 내 황금기”

입력
2021.04.30 09:00
수정
2021.04.30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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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엄마] <5>이향란

편집자주

이향란(69)씨가 인터뷰하며 가장 많이 말한 단어 중 하나, ‘밥’입니다. 결혼한 지 47년, 자식 둘과 남편, 시어머니에, 사위, 손주까지 온 가족의 밥을 그가 책임졌거든요. 맏딸 문소리씨가 배우가 되고 나서도 엄마 이향란씨는 직접 도시락을 싸줄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 ‘밥의 시간’에서 ‘이향란의 시간’으로 날아오르려 합니다. 2년 전 시니어 모델을 양성하는 아카데미에 다니기 시작한 걸 계기로 배우라는 꿈이 생긴 겁니다. 그는 “30대에 포장마차를 하면서 겨울에도 찬물에 담그며 일한 손”이라며 손 내놓기를 쑥스러워했지만, 그 손이야말로 생명을 키워낸 귀한 손 아닐까요. 그런 시간과 의미가 응축된 손으로 감동의 한 컷을 만들어내고 삶이 녹아든 연기를 하는 그날을 꿈꿉니다. 그는 지금이 그래서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이번 인터뷰는 과거의 ‘엄마 이향란’이 ‘배우를 꿈꾸는 이향란’에게 하는 독백 형식입니다. 함께 들어보실까요.


포장마차, 토스트 장사로 생계 일구고
두 노모에 자식, 손주까지 밥 해 먹인 삶
“이젠 배우로 엔딩크레디트에 오르고 싶어”

시니어 모델이자 배우 지망생 이향란씨를 22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그는 배우 문소리씨의 엄마이기도 하다. “평생 밥만 했고, 가장 잘하는 것도 밥이었다”며 웃는 그는, 이제야 자신의 꿈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고 있다. 이한호 기자

향란아, 니 참 잘 버텼다. 35년 전 네 식구가 빈손으로 부산서 서울로 올라와가 살 때만 해도 얼마나 막막했드나. 소리 아빠가 자리를 못 잡아가 “그냥 다 함께 죽자” 했을 때 나쁜 마음 먹었으면 우짤 뻔했노. 나이 칠십에 이래 인생의 황금기가 왔는데.

◇손에 물도 안 묻히고 산 줄 알았다고?

생각해 보면 참 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언젠가 목욕탕에서 누가 그랬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사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속으로 얼마나 웃었나. 내 이 손을 보라고, 이게 어디 그런 손이냐고 했제. 내가 살아온 세월은 이 두 손이 다 안다. 일을 워낙 많이 해놓으니까 그렇잖아도 큰 손이 뼈마디는 굵어질 대로 굵어지고 살갗은 또 얼마나 거칠어졌나. 오늘 인터뷰한다고 좀 뽀얗게 보일까 싶어가지고 손에다 뭣도 좀 바르고 다이소에서 손톱 스티커도 사다 붙이고 왔는데 좀 나은가 어쩐가 모르겠다.

이 두 손, 어디다 참 내밀기도 민망하지마는, 이 두 손 아니었으면 자식 둘에 남편, 손주까지 어떻게 먹여 살맀겠노. 소리 아빠가 그런 험한 말까지 했을 때가 소리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6학년 올라갈 무렵이었제. 돈벌이가 안 되니까는 본인도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하면 그랬겠노. 하지마는 애들이 있는데 어떻게 죽어. 그래 말하고 대신 내가 나가 돈을 벌었제.

석촌호수에 가봤더니마는 포장마차가 쭉 있더라고. ‘저거를 한번 해보면 좋겠다’ 싶은데 돈이 있어야 말이제. 친구한테 몇십만 원을 빌려서 포장마차를 안 차맀나. 체구 작은 여자가 혼자 포장마차 끌고 다니니까 아마 누가 보면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거 같았을 기다. 서른넷 젊을 때니까 뭐 힘들고 말고 생각할 겨를이 없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사치인 시절이었고. 밤새 장사하고 새벽에 집에 들어가서도 잘 수가 있나. 애들 도시락 싸서 학교 보내야 하니까는 쌀 안쳐놓고 싱크대에 이래 기대 앉아서는 밥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 깜빡 졸아서 한 두어 번 태워먹기도 했다. 참, 생각해보면 나는 없는 세월이었어.

장사를 시작하면서 집도 자양동서 석촌동 지하방으로 이사를 갔제. 근데 부산서는 반에서 1등 하던 소리가 1등을 못 하는 거야. 어느 날에는 소리가 또 “엄마, 나 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게 너무 힘들어” 하는 기다. 어릴 때부터 안 그래도 몸이 약했던 아인데. 한의원 가서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다 먹이면 딱 좋겠는데 형편이 돼야지. 수소문 해보니 경동시장에 한약을 월부(할부)로 지어주는 데가 있다기에 거기서 보약을 한 재 해다 먹였지. 이웃들은 좀 아마 그거하게(의아하게) 생각하는 거 같드라고. 지하방에 살면서 아침마다 애한테 보약을 멕이니까.

◇포장마차하며 보약에, 과외까지

그의 말투는 약간 부산 사투리가 배어 유쾌하다. 그는 “서울에서는 사투리로 들리는데 부산에 가면 또 그게 아니다”라며 웃었다. 광주 송정리에서 태어나 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산으로 이주했고 서른네 살 이후로는 서울에 살아서다. 이한호 기자

그래도 향란아, 그만하면 니가 애들 가르칠 거는 다 가르쳤다. 소리가 부산서는 피아노도 배우고 그랬는데 서울서는 못 하면 자존감이 떨어질까 싶어가지고 바이올린에, 영어, 수학 과외도 시켰잖노. 포장마차 하면서 애 과외까지 시키니까 누가 그랬제? “소리(엄마)야, 나중에 니 노후도 생각해야지.” 그런데 그때는 어땠노. 내가 지금 내 노후를 생각할 때인가, 우쨌든지 그저 오늘 잘 사는 것, 그리고 애들 교육 잘 시키는 게 중요했제. 그게 다 나를 생각하느라 해준 말이지만 그때는 귀에 안 들어오드라.

그 포장마차가 생각보다 잘돼서 다행이었다. 지금도 내가 한 음식은 식구들이 다 맛있다고 하는 거 보면 그래도 솜씨가 없지는 않나 봐. 포장마차를 한 2년 하니까 이대로 가면 작은 가게라도 하나 얻을 수 있겠다 싶드라고. 그때 소리 아빠도 택시 회사 들어가서 일을 시작했고.

근데 어느 날 (둘째 아들) (양)일이 학교 담임선생님한테 전화가 와서 얼마나 놀랬노. 학교에 갔더니만 (양)일이가 게임방 같은 데를 갔다는 거야. 막 그런 게 생길 때인데. 지금이야 별일도 아닌데, 그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학교서 집까지 오는 내내 얼마나 울었는지. 내가 즈그 잘 키울라고 이래 고생을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고. 그러니 그렇게 눈물이 나드라고.

집에 와서는 소리 아빠한테 그랬제. ‘나는 이제 포장마차 못 하겠다’고. ‘애들이 즈그들끼리만 있고 하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갑다. 이건 아닌 것 같다’고. 그래서 포장마차를 접었더니마는 또 수입이 줄어드니까 아쉽잖아. 참나, 내도 가만 놀지를 못한다. 궁리하다가 아침마다 잠실역 근처 길에서 토스트 장사도 했제. 아마, 소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했든 거 같은데. 그것도 꽤 돈벌이가 잘됐다.

◇“엄마, 나는 왜 이렇게 일복이 많아”

젊은 시절의 엄마. 남편 문창준씨와 결혼 전 부산 바닷가에서 데이트하던 때다. 그가 입은 부츠컷 팬츠 셋업이 지금 봐도 멋스럽다. 오른쪽 사진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날, 딸 소리·아들 양일씨와 함께 찍은 것이다. 이향란씨 제공

내가 이래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집서 한 이불 덮고 살아도 팔자가 다 다르구나 싶어. 우리 영감(남편) 보면 어떻드노. 나는 자식들에다, 나중에는 양쪽 어머니 두 분 수발에다, 손주들 태어나니 또 고것들 밥까지 평생 해멕이는데, 나랑 같이 사는 영감은 가만히 있어도 손주들이 언제든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지, 바로 옆에 어머니 계시지 그러니 너무 행복한 거야.

우리 엄마 살아계실 때 내가 오죽했으면 그랬겠노. “엄마, 엄마는 왜 그렇게 나를 일복 많이 타고나게 만들어놨냐”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일이 많았노. 내가 일을 사서 만드는 편인가.

소리가 영화 ‘오아시스’(2002) 찍고 몇 년 안 돼서 우리 시어머님이 치매에 걸리지 않았나. 근데 그냥 못 두겠더라고. 어머님이 자꾸 핸 말 또 하시고 핸 말 또 하시고 하니까 손자들도 슬슬 피하고. 어머님이 혼자 앉아 있는데 그 뒷모습이 그렇게 쓸쓸해 보였어. 방 두 칸짜리 우리 집으로 모셔온 게 그때다. 마침 소리도 원룸 얻어서 나가 살기 시작했고, (양)일이는 군대 가 있을 때라. 그로부터 10년을 모시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러다가 소리가 결혼(2006)하고도 이건 산 넘어 산이야. 소리네가 우리 살던 (경기) 평택 집으로 들어왔는데, 내가 그때 몇 사람 밥을 한 건가. 어머님은 한집에 모시고 살고, 근처에 우리 엄마에, (노화로) 다리가 불편한 안사돈까지 살았으니 누가 그분들을 다 챙기나. 내가 해야지. 처음엔 안사돈이 우리 엄마랑 한 살 차이라 두 분이서 한집서 살면 좋겠다 싶었거든. 근데 종교가 달라서 그건 안 되드라고. 다른 사람 같으면 명절이면 시집이나 친정이라도 가잖아. 내는 뭐 어디 가기는커녕 명절 음식 해서 사돈네까지 갖다 줬으니. 노인 세 명 모시고 동네 목욕탕 가서 머리 감기고 등 밀어드리는 것도 누가 했겠나. 목욕탕서 사람들이 “노인을 세 명이나 모시고 왔느냐”면서 막 웃었지.

연두가 태어나고는(2011) 연두 보는 것도 내 몫인 거라. 내가 연두를 안 봐주면 소리가 일 자체를 못 하는데 어떤 부모가 자식을 외면하겠노. 연두가 돌 무렵인가. 하루는 거실에서 연두 재우면서 이래 누워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또르르 흐르는 거야. ‘나는 뭐지. 내 인생은 또 뭐지. 나는 뭣하는 사람인가’ 싶드라고.

진짜 죽을 거 같이 너무 힘들어서 이런 생각까지 한 적이 있지 않나. ‘진짜 어디 병이라도 나서 병원에서라도 며칠 쉬었으면 좋겠다.’ 근데 진짜 심장 혈관에 문제가 생겨서 수술을 하게 됐제. 수술실 들어갈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담담했는데 마취에서 탁 깨고 나니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가족이더라고. 간호사가 그때 “가족 불러드릴까요” 했는데 느낌이 정말 남달랐제. 목걸이로 가린 가슴 쪽 이 흉터가 그때 수술 자국이다.

◇여행과 명상이 마음의 탈출구

그는 눈물도, 웃음도 많았다. 감정에 솔직해서일 거다. “안 좋은 과거는 빨리 잊어버려야 새롭고 좋은 기억이 그 자리로 간다”면서도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는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이한호 기자

아마 여행 다니고 명상도 하고 그러지 않았으면 내 못 버텼을 기다. 오십대 때부터 그렇게 혼자 여행을 갔으니까. 처음 여행 간다고 했을 때 소리 아빠가 “어떻게 남편 허락도 안 받고 가느냐”고 하대. 내가 그랬제. “내 나이가 오십이 넘었는데 통보만 하면 됐지, 무슨 당신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고. 엄마는 또 그러시대. “그렇게 열흘씩, 보름씩 가며는 식구들 밥은 어떡하냐”고. 그래서 또 내가 이랬제. “엄마, 내가 없다고 지구가 안 돌아가나. 다 못 살 거 같아도 사는 수가 있다”고. 내도 살아야 하니까 말하자면, 도망을 간 거제. 그렇게 유럽으로 처음 떠난 여행이 내 탈출구였다. 그때 느낀 기는 이거다. 여행은 소비가 아니고 투자다, 나를 위한 투자. 백화점도 안 가고, 명품도 안 사고, 내가 나를 위해서 돈 쓰는 데라고는 여행밖에 없었다고.

그리고 명상. 몸이 힘든 거는 그렇게 넘어간다 쳐도 마음이 힘든 거는 견디기가 어렵더라고. 근데 소리가 한번은 “할 수 있는 만큼만 (가족들한테) 하라”면서 명상을 권하대. 정토회 법륜 스님이 하는 ‘깨장’(깨달음의장)이라는 수행 프로그램에 그때 갔제. 거기 다녀오면서 마음을 내려놓는 법을 알게 되고 또 내 상황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지. 그런데 내가 스님들처럼 오래 수행하면서 마음을 닦는 법을 배운 게 아니니까 몇 년 지나고는 다시 힘들어지는 거야. 그즈음에 소리가 외국의 유명한 수행자가 와서 하는 명상 프로그램이 있는데 한번 가보라고 하더라고. 처음에는 너무 비싸다고 손사래를 쳤더니만 소리가 이랬제. “엄마, 비싸면 비싼 대로 뭔가가 있을 거야.” 사실은 거기도 소리가 안 보내줬으면 그 돈을 내고 나는 안 갔을 기다. 아무튼 소리 말 듣고 거기 가서 배우다 보니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드라고. ‘내가 왜 이렇게 징징대면서 살지. 뭐든지 다 끝이 있기 마련이고, 어떤 힘든 일도 다 지나갈 텐데.’ 명상 알려준 거는 지금도 소리한테 참 고맙게 생각해. 내가 이래 지치고 힘들어 보이고 하면 “엄마, 어디 한번 바람이라도 쐬고 와” 해주는 거는 내 딸이제.

내는 소리가 배우가 되고 나서도 계속 도시락을 싸 멕였다. 소리가 바깥 음식을 잘 못 먹으니까. ‘저거 먹고 우찌 사나’ 싶을 정도로 양도 적고. 소리가 연극할 때는 스태프들이 소리 도시락을 맛있어 했다고 하면 또 그 사람들 것까지 싸주고. ‘이거 도시락만 싸다가 내가 어떻게 되겠다. 나도 정년퇴직 해야지 더는 못 하겠다’ 생각할 때 소리가 금일봉이랑 편지를 써서 준 거야. ‘살가운 딸이 못 돼줘서 미안해. 엄마한테 늘 고마워. 엄마 딸이라 얼마나 좋은지 몰라.’ 자식인데 우짜겠노. 계속 발목이 잡혔제. 하하.

◇손주 키우며 자식한테 생긴 미안함

그는 “소리가 배우 하겠다고 했을 때 제 아버지가 당부한 건 ‘가십 거리나 만드는 배우는 되지 말라’는 하나였다”며 “그때 약속을 이제껏 잘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오른쪽 사진은 남편 문창준씨와 딸 소리씨, 사위 장준환 감독, 아들 양일씨 내외, 손주들까지 함께한 기념 사진. 이향란씨 제공

연두. 그래, 내가 연두는 참 잘 키웠다. 하루는 소리 내외랑 이래 와인을 한 잔 하는데 (사위) 장(준환) 감독이 소리한테 애를 하나 더 낳자는 거야. 그때는 내가 정색하고 그랬다. “그래, 애 놓으면 우찌 커도 안 크겠냐마는 나는 못 봐준다.” 그 뒤로는 둘째 얘기는 안 하대. 그래도 우쨌든 내가 손주는 후회 없이 키웠고, 또 지금 잘 크고 있어서 그거 하나는 진짜 뿌듯해.

근데 연두를 보면 그렇게 소리한테 미안하드라고. 소리가 임신했을 때 보니까, 원래 양도 적고 고기도 안 좋아하는 애가 과일이며 고기를 그렇게 챙겨 묵드라. 그래서 그런가. 연두가 건강해. 면역력도 좋고. 근데 소리는 참 약하게 태어났거든. 내가 스물두 살에 소리를 낳았으니 진짜 애가 애를 놓은 거잖아. 소리를 가졌을 때 잘 못 먹고 그래서 소리가 약하게 태어났나 싶은 기제. 애들 키울 때도 지금처럼 무슨 육아 정보가 있기를 했나, 그냥 보고 듣고 해서 키운 기제. 지금 같으면 우리 소리랑 (양)일이도 더 잘 키웠을 텐데. 그러니 아직도 애들한테 그렇게 미안해. 내가 더 뒷바라지를 잘했으면 우리 애들이라고 서울대학은 못 갔을까. 키우다 보니 참 서울대학이 점점 더 커 보이드라마는. 자식이란 게 그런 거 같다. 생각하면 늘 못해준 거, 부족하게 해준 것이 생각나서 미안하고 미안해.

자식은… 말해 뭐하노. 내 자신보다 더 중요한 존재지. 엄마가 살아계실 때 어느 날 나한테 그러시는 기다. “니는 목숨 걸고 자식 키우지 않았냐”고. ‘아,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구나. 우리 엄마가 그걸 아는구나’ 싶어서 참 위로를 많이 받았다.

그래도 우리 애들이 잘 자라줬다. ‘애들이 참 괜찮게 컸구나’ 싶었던 적이 있제. 소리가 ‘오아시스’ 찍고 나서 의류사업을 하던 투자자가 배우들한테 좋은 파카(패딩 점퍼)를 한 벌씩 준 거야. 그때까지 그런 브랜드 파카를 소리도 못 입어보고, 나도 못 입어봤을 때라 소리가 그걸 가져왔길래 ‘지가 입을랑갑다’ 했제. 근데 어느 날 애들하고 한 차로 어디를 가는데 소리가 ‘오아시스’ 찍을 때 도움을 준 장애인 친구한테 그 파카를 선물할 거라는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도 못 입어본 좋은 옷을 왜 남을 주나 싶드라고. 그래서 “나한테 두 개가 있을 때 남한테 하나를 주는 거 아니야” 했드니만, (양)일이는 “엄마, 두 개 있어서 남한테 하나 주려면 평생 주기 힘들어요”라고 하고, 소리는 “엄마하고 나는 나중에도 입을 수 있을 거야” 하는 거야. 그 말 듣는데 내가 되게 부끄럽더라고. 와 이리 눈물이 나노. 엄마라면서 나이만 먹고 생각은 짧구나 싶었제.

◇나이 일흔에 찾은 내 삶

그는 “모델로 사진 찍을 때도 손 때문에 곤혹스럽다”며 쑥스러워했다. 고생의 흔적이 두 손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다. 이한호 기자

어릴 때 나한테도 꿈이란 게 있긴 했을 텐데.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 맏딸로 태어나서 대학에 그렇게 가고 싶었지만 간다고 말도 못 했다. ‘내가 가면 남동생 셋은 어쩌나’ 싶어서.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얼른 돈 벌어야지’ 싶어가 자진해서 상고(부산여상) 가서 졸업하자마자 취직해 일하다, 철없는 나이 스물하나에 소리 아빠 만나가 지금까지 살아온 기제.

그래도 나한테 소리 같은 자랑스럽고 믿음직스러운 딸이 있어서 참 감사하다. 우리 엄마가 암으로 호스피스 병동에 두 달 계실 때 종종 그러셨잖아. “향란아, 내가 딸이 없었으면 우짤 뻔했노.” 내가 곰살맞은 딸이 못 돼서 엄마한테 참 죄송했는데 나도 그때 그런 생각이 들드라고. 아들이었으면 엄마 기저귀를 갈아 줄 수가 있나, 몸을 제대로 닦아줄 수가 있나. 소리가 딸이래도 좀 어려운, 아들 같은 딸이지만, 딸과 엄마 사이에는 자세히 말 안 해도 통하는 신뢰가 있제.

내 인생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 오늘이 온 거야. 챙겨야 할 어르신들 모두 돌아가시고, 연두도 어느 새 커서 내 손이 그렇게 필요 없는 나이가 됐고. 이제야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나씩 해보고 있다.

2년 전부터 모델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하나씩 배워가고 있고 몇 년 전 시작한 영어 공부도 그래 재미있어.

아카데미에서 사람들이 종종 내한테 ‘무슨 일 하다가 왔냐’고 물어. 그럼 나는 그런다. “지금까지 밥만 하다가 왔다”고. 나는 잘하는 게 진짜 밥밖에 없었어. 그렇게 살던 나한테 어느 날 지인이 옷도 잘 입는데 모델 해볼 생각 없냐고 한 거야. 낼모레 칠십인데 무슨 모델이냐고 했더니마는, 일흔여덟에도 모델로 활동하는 최순화 선생님 얘기를 해주드라고. 그래 수업이나 한번 구경해보자 해서 갔더니만 괜찮은 거야. 보는 것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실제 하면 얼마나 더 재미있겠나 싶어서 등록한 기제.

◇나이의 의미

그는 “미래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을 충실하게, 재미있게 살면 그게 쌓여 미래가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산 과거가 오늘의 그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이한호 기자

이 나이 먹으면 같은 일상이 반복되니까 그렇게 웃을 일이 많지 않아. 그런데 아카데미에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내가 좋은 기운도 받고 또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재미도 느끼는 기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살아왔는데, 아카데미 다니면서 ‘어, 나한테 이런 면도 있었나’ 싶은 순간이 많다.

특히 연기는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봐야 가능한 건데 그게 나한테 힐링이 되더라고. 요즘은 혼자서 여기저기 단편 영화 오디션도 보러 다닌다. 소리는 현장에서 단역 배우로 일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서 그런지 좀 마뜩잖아 하는 것 같지마는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떨어지는 것도 배움이고 경험이야. 오디션 섭외가 들어오는 것도 감사한 일이제. 이렇게 재미나게 준비하다 보면 언젠가는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 ‘이향란’ 이름 석 자가 뜨는 날도 오지 않겠나. ‘문소리 엄마’가 아니라 ‘배우 이향란’으로 불리는 날 말이다.

향란아, 너무너무 힘들 때도 있었지만, 애들 다 잘 키워놨으니까 그걸로 충분하게 보상받은 거 아니겠나.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겠나 싶다. 그렇게 힘든 시기를 잘 버텼으니까 이렇게 좋은 시간도 온 것 아니겠나. 밥만 하며 살았어도 자식들, 손주들 보면 지나온 세월이 헛되지 않았구나 느껴지지 않나.

내가 살아온 시간이 부끄럽지 않은 게 내 자존감이다. 좋은 대학 나와야 자존감이 생기겠나. 이 나이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고, 목표가 있고, 그걸 향해서 노력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재미있노. 그래서 지금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하제?

나이가 든다는 게 어떤 의미겠노. 젊어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속에서 불덩이가 왔다 갔다 하고, 죽을 것 같이 힘든 일도 이제는 웬만하면 이해가 되고, 그럴 수 있다 싶고, 또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니라는 걸 터득하게 되는 거 아니겠나. 그렇게 넉넉해지니 나이 드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드라꼬.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내 모습을 사랑하면서 사는 지금 니가 그래서 참 대견스럽다. 잘하고 있다, 이향란.



김지은 인스플로러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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