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가 백인 남성 중심의 시상식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품었다. 사상 최초로 아시아 여성 감독이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고, 아시아 여성 배우와 흑인 남성 배우가 나란히 남녀조연상을 차지했다. 시상을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하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흑인의 시각에서 흑인 문제를 다룬 영화와 여성 감독이 연출한 페미니즘 영화가 주요 부문 후보에 올라 수상하는 등 올해 오스카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성이 두드러졌다.
중국 출신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는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프랜시스 맥도먼드) 3개 부문을 수상하며 이날의 주인공이 됐다. 아시아 여성 감독의 영화가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건 두 부문 모두 처음 있는 일이다. 여성 감독으로선 두 번째인데 캐스린 비글로 감독이 ‘허트 로커’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지 11년 만이다.
과거 인터뷰에서 중국을 “사방에 거짓말인 곳”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며 중국 정부의 미움을 산 자오 감독은 이날 무대에선 수상 소감으로 정치적 발언 대신 개인적인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어린 시절 중국에서 살 때 아버지와 시를 외우곤 했는데 ‘사람은 선천적으로 선하다’는 문장이 기억에 남고 아직까지도 그 말을 믿는다”며 “가끔은 그 반대인 것 같아 보일 때도 있지만 세계 어디서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 안의 선함을 찾으려 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자신의 선함과 서로의 선함을 유지하려는 용기와 믿음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 이 상을 돌리고 싶다”고 말했다.
‘노매드랜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유목민처럼 떠돌게 된 중년 여성의 여정을 그린다. 주연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파고’(1996), ‘쓰리 빌보드’(2018)에 이어 세 번째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데 이어 제작자로서 자오 감독과 작품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다. ‘노매드랜드’의 수상은 할리우드에서 극소수에 불과한 아시아 여성 영화인의 저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날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아시아 출신 여성 영화인 2명이 주요 부문을 수상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번 시상식은 한국 영화계에 오래 남을 장면들을 여럿 연출했다. 봉준호 감독이 지난해 ‘기생충’으로 작품상,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데 이어 윤여정은 여우조연상 수상으로 2년 연속 한국인 수상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봉 감독은 올해 시상자로 나서 한국어로 감독상을 수여했다. 그는 ‘감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섯 후보 감독에게 던진 뒤 받은 답변을 한국어로 읽었고, ‘기생충 통역사’로 유명해진 샤론 최가 영어로 통역해 뜻을 전했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단편 애니메이션 '오페라'로 단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오른 한국계 미국인 에릭 오 감독도 한국계 영화인의 힘을 보여줬다.
올해 작품상 후보작들은 미국이 품고 있는 다양성에 주목했다. ‘미나리’는 흑백논리에 밀려 그간 소외돼왔던 미국 내 아시아인의 삶을 그려 극찬을 받았다. 각본상 수상작 ‘프라미싱 영 우먼’은 여성주의 시각으로 풀어낸 '미투 시대'의 복수극이다. 친구를 성폭행한 남성에게 복수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술 취한 여성’에 대한 왜곡된 윤리적 판단을 꼬집는다. 여성 감독 에메랄드 페넬이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았다.
1960년대 말 격동의 미국 정치사를 다룬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지난해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블랙 라이브스 매터(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과 연결되는 작품이다. 21세의 나이에 미국 정부에 암살당한 급진적 흑인운동단체 흑표당의 일리노이주 지부장 프레드 햄프턴의 비극적 죽음과 그를 배신한 FBI 정보원 윌리엄 오닐의 내적 갈등을 다룬다. 작품상은 놓쳤지만 햄프턴을 연기한 대니얼 칼루야에게 남우조연상을 안겼다. 그는 무대에 올라 “그들이 우리를 분열시키고 정복하려 할 때 우리는 단합하고 올라섰다”면서 “(프레드 햄프턴이 남긴 유산과 관련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남녀주연상(채드윅 보즈먼, 비올라 데이비스) 후보에 올라 관심을 모았던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의상상 수상과 흑인 최초 분장상(미아 닐, 자미카 윌슨) 수상이라는 이정표를 세우는 데 만족해야 했다. 남우주연상은 ‘더 파더’에서 치매에 걸린 노인을 연기한 앤서니 홉킨스가 차지했고,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쓴 플로리앙 젤레르와 크리스토퍼 햄프턴은 각색상을 받았다.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은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음악상을 수상했다. 10개 부문에 이름을 올려 최다 부문 후보작이었던 '맹크'는 촬영상과 미술상을 받는데 그쳤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