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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에 교수 된 천재와 돌연변이들이 세계 최초로 만든 바나듐 이온 배터리

입력
2021.04.26 16:31
수정
2021.04.27 08:5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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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 “효율 높지만 불 안 나고 저렴하며 재활용 가능한 배터리 개발”
대기업들 투자와 제휴 문의 쇄도 “배터리 산업의 록펠러 될 것”

최근 전세계 배터리 관련 업체들을 놀라게 한 일이 국내에서 일어났다. 신생기업(스타트업)이 화재 위험이 없고 저렴하며 재활용까지 할 수 있는 바나듐 이온 배터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이다. 이를 활용하면 전기자동차용 고속충전소나 대용량 에너지 저장시설(ESS)을 안전하고 저렴하며 친환경적으로 만들 수 있다. 소식이 전해지자 벌써부터 대기업들의 투자와 전략적 제휴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화제의 바나듐 이온 배터리에는 7년간 한 우물을 판 천재 사업가의 집념과 노력이 녹아 있다. 과학고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17세 때 카이스트에 입학해 27세에 대학교수가 돼서 28세 때 스타트업 스탠다드에너지를 창업한 김부기(36) 대표가 주인공이다.

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바나듐 이온 배터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앞에 놓인 누런 종이상자 모양이 바로 바나듐 이온 배터리다. 배우한 기자

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바나듐 이온 배터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앞에 놓인 누런 종이상자 모양이 바로 바나듐 이온 배터리다. 배우한 기자


바나듐 이온 배터리가 뭐길래

바나듐 이온 배터리는 전기를 전달하는 주성분(전해질)을 바나듐이라는 광물로 만든다. 이를 리튬으로 만들면 휴대폰이나 전기차에 주로 쓰이는 리튬 이온 배터리, 납으로 만들면 내연기관 자동차에 들어가는 납 배터리가 된다.

기존에도 바나듐을 이용한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가 있었다. 그런데 흐름전지는 바나듐을 담아 두는 일종의 커다란 연료탱크가 필요해 활용도가 떨어졌다.

김 대표는 획기적 기술로 이 같은 한계를 돌파해 세계 최초로 작고 성능이 뛰어난 바나듐 이온 배터리 개발에 성공했다. 김 대표는 23일 서울 테헤란로 서울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실물을 처음 공개했다. “직원들도 극히 제한된 인력만 실물을 봤어요.”

특이하게 그가 가져온 배터리는 표면을 재활용 가능한 딱딱한 종이로 만들어 눈길을 끌었다. 종이로 외부를 감싼 배터리는 처음이다.

크기는 가로 길이가 성인 남자의 손으로 한 뼘 반을 넘지 않았고, 높이와 폭도 한 뼘이 채 되지 않았다. 구체적 수치와 시간당 수십 와트의 저장용량은 기밀이어서 공개하지 않았다. “배터리 업계에서는 규격을 알면 내부 구성을 유추할 수 있어요.”

무게는 약 4kg으로 묵직했다. “작은 공간에 에너지 밀도를 높였기 때문에 무거워요. 그래서 이 제품은 처음부터 휴대용이나 전기차 배터리가 아닌 ESS용으로 개발했죠. 이 작은 배터리를 원하는 용량만큼 이어 붙이면 ESS를 만들 수 있어요.”

바나듐 선택 이유 ‘국내에도 묻혀 있기 때문’

바나듐은 매장량이 부족한 리튬과 달리 흔한 광물이다. 국내에도 묻혀 있어서 현재 광산을 개발하고 있다. 따라서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리튬이나 희토류와 달리 자원국들의 횡포에 덜 시달릴 수 있다. 리튬은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등에서 주로 나오고 희토류는 대부분 중국에서 채굴해 이들이 수출을 제한하면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바나듐은 합금으로 가공돼 드라이버나 각종 금속 도구 등 생활 곳곳에 쓰인다. 심지어 영양제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바나듐은 혈당을 낮추고 나쁜 콜레스테롤 형성을 억제하며 뼈와 연골 형성을 돕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도 먹고 있는 바나듐 영양제를 가져와 보여줬다. “일부러 바나듐을 알리려고 영양제를 먹어요.”

김 대표가 처음부터 바나듐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ESS 배터리가 갖춰야 할 조건들을 만족할 만한 물질을 찾으려고 많은 시험을 거치다가 바나듐을 발견했다. 하지만 기존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 기술로는 원하는 배터리 개발이 어려워 완전히 새로운 전지 기술을 7년에 걸쳐 개발했다.

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가 바나듐을 알리려고 일부러 먹고 있는 바나듐 영양제를 보여주며 웃고 있다. 배우한 기자

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가 바나듐을 알리려고 일부러 먹고 있는 바나듐 영양제를 보여주며 웃고 있다. 배우한 기자


드릴로 뚫어도 불 안 나, 재활용도 가능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불날 염려가 없는 배터리라는 점이다. 그동안 배터리는 국내외에서 여러 번 발생한 ESS와 전기차 화재로 안전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

이 배터리는 내부의 전해질이 물로 돼 있다. 바나듐을 갈아서 물에 섞어 배터리를 채웠기 때문에 과충전 되거나 충격을 줘도 불이 나지 않는다. “물은 불에 타지 않죠. 드릴로 뚫는 충격 시험에도 폭발하지 않았어요.”

재미있는 것은 외부 포장을 뚫어도 물이 새어나오지 않는다. 자체 개발한 특허 기술에 따라 평소 액체 상태인데 충격을 가하면 흐르지 않는 성질로 변한다. 배터리를 들고 흔들어 봐도 출렁이지 않았다. “몇 가지 성분의 전극 소재가 전해질인 물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잡아 줘요. 해당 소재는 비밀입니다."

무엇보다 이 배터리는 재활용이 가능하다.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의 경우 전기차 배터리를 ESS에 재사용하기도 하지만 분해해서 완전히 새로운 제품으로 다시 만드는 재활용은 드물다. 김 대표는 처음부터 재활용을 목표로 배터리를 개발했다. 특히 내부 소재인 분리막과 구조체는 카페에서 사용 후 버리는 1회용 플라스틱 컵 등 폐플라스틱으로 만들 예정이다. “외부를 감싼 재활용 종이와 분리막 등 내부 소재를 분해해서 다른 배터리에 그대로 사용할 수 있어요. 이를 위해 재활용 기술도 따로 개발해 특허를 냈죠.”

김 대표가 가장 강조하는 장점은 에너지 효율이다. 에너지 효율이란 충전한 전기를 얼마나 꺼내 쓸 수 있는지를 의미한다. “에너지 효율이 모든 배터리를 통틀어 가장 높은 96%예요. 즉 충전한 전기의 96%를 꺼내 쓸 수 있고 손실이 4%에 불과하다는 뜻이에요.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는 제조사마다 다르지만 대개 90% 내외에서 많으면 90% 중반이에요.”

특히 ESS는 야외에 설치하는 경우가 많아 에너지 효율이 중요하다. 기온에 민감한 리튬 이온 배터리는 추운 겨울에 빨리 소모된다. 그래서 휴대폰 배터리가 겨울에 빨리 닳는다. 바나듐 이온 배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김 대표의 설명이다. “기온이 떨어져도 에너지 효율이 저하되지 않아 야외에 설치하는 ESS에 적합하죠.”

수명도 길고 용량 안정성도 우수하다. “수명이 10년이어도 성능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이를 용량 안정성이라고 해요. 이 배터리는 시험 장비에 2년간 걸어 놓고 가혹한 조건에서 8,000번 방전과 충전 시험을 했는데 성능 변화가 거의 없었어요. 따라서 기대 수명은 8,000번 이상이죠. 다른 배터리는 몇 백 번 방전 후 충전하면 성능 저하가 일어납니다.”

가혹한 조건이란 완전 방전을 의미한다. 기존 배터리는 완전 방전 후 충전하면 성능이 떨어진다. 그래서 배터리를 완전히 방전시키지 말라고 강조한다.

“첨단 기술은 머릿수가 아닌 돌연변이들이 만든다”

배터리 개발 기술들은 국내외에서 20건 이상 특허 출원된 상태다. 당연히 연구 인력 확보 등에 많은 돈이 들었을 텐데 김 대표는 “의외로 많이 들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김 대표는 소프트뱅크벤처스, 하나금융투자, 기술보증기금, LB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총 250억 원을 투자받았다. “대기업이 갖고 있는 수천 명의 인력과 천문학적인 돈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초격차 시대의 첨단 기술은 머릿수가 아니라 돌연변이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요.”

김 대표는 총 49명의 직원 가운데 카이스트와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출신 박사 10명을 포함해 절반을 차지하는 개발 인력을 ‘돌연변이들’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요. 개발 과정에서 배터리 성능을 떨어뜨리는 부반응(부작용)이 발견됐는데 이를 차단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역이용했어요. 씨름꾼이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듯 부작용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역이용해서 성능을 끌어올렸죠.”

특이하기는 김 대표도 마찬가지다. 그는 배터리 전문가들이 모인 곳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수많은 투자사를 돌려보냈다. “각 개발 단계마다 꼭 필요한 금액만 받았어요. 배수진이죠. 그래야 절박해지거든요. 한편으로는 비용 예측을 충분히 할 만큼 기술 개발에 자신 있었어요.”

지금은 전기차를 만들거나 배터리를 생산하는 대기업들이 전략적 투자를 하려고 적극적이다. 대기업들은 김 대표와 손잡고 전기차 초고속 충전소를 만들어 보급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해외에서도 투자 제의가 밀려든다. “중국을 비롯해 바나듐 광산을 갖고 있는 여러 나라에서 투자 제의를 많이 받았어요. 광산 옆에 생산 시설을 지으면 아무래도 물류 비용 등이 줄어들죠.”

국내 공장에서 소재부터 제품까지 모두 생산

스탠다드에너지의 또 다른 경쟁력은 소재부터 제품까지 모두 만든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대전에 소재와 제품 등 두 군데 공장을 운영한다. 이미 배터리 양산에 들어갔다. 내년 생산 목표는 연 1.5GWh(기가와트시)다. 이를 매출액으로 환산하면 수천억 원 규모다. 초도 물량은 모두 모 대기업이 만드는 전기차용 초고속 충전 시설에 들어간다.

조만간 추가 부지를 확보해 공장 규모를 더 늘릴 예정이다. 김 대표는 공장 증설 때문에 대기업들과 전략적 투자 논의에 긍정적이다. “대기업들은 생산시설을 늘려서 공격적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싶어 해요. 해외 시장을 겨냥해 해외 공장을 짓는 방안도 검토 중이죠.”

김 대표는 본격 양산에 들어가면 리튬 이온 배터리보다 저렴하게 판매할 계획이다. 구체적 가격은 아직 미정이다. “생산량이 늘어나면 제품 가격은 극적으로 떨어질 거예요.”

17세에 카이스트에 입학해 27세 때 카이스트 교수가 된 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는 에너지 불평등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ESS용 배터리 회사를 창업했다. 배우한 기자

17세에 카이스트에 입학해 27세 때 카이스트 교수가 된 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는 에너지 불평등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ESS용 배터리 회사를 창업했다. 배우한 기자


에너지 불평등 없는 세상 만드는 것이 꿈

창업자인 김 대표는 전남과학고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17세 때 카이스트에 입학한 천재다. 그곳에서 신소재 응용기계설계로 25세 때 박사 학위를 받고 27세 때 연구교수가 됐다.

창업은 교수 권유로 28세 때 하게 됐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 방법은 창업밖에 없더라고요." 처음부터 기존 배터리와 다른 방식의 ESS용 배터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사명은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 오일을 겨냥해 지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석유산업의 정상에 선 기업이죠. 배터리 시장에서 그런 기업이 되고 싶어요. 테슬라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기업이 국내에도 하나쯤 나와야죠. 새로운 에너지 시장의 록펠러가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넘어야 할 벽이 있다. 바로 ESS 규제다. 정부에서는 잇따른 화재 사고 때문에 ESS를 되도록 실외에 설치하라고 강조한다. 그렇게 되면 건물 실내 주차장에 전기차용 초고속 충전시설을 대규모로 설치하기 힘들다. 그래서 김 대표는 ESS 규제 적용을 예외로 해달라고 정부에 샌드박스 신청을 했다.

만약 샌드박스 신청이 통과되지 못하면 해외를 겨냥해야 한다. “세계 최초로 국내에서 만든 기술이니 국내에서 처음 쓰였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규제가 풀리지 않으면 시장을 찾아 해외로 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김 대표의 꿈은 에너지 불평등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부자와 빈자 간에 에너지 불평등이 심했죠. 앞으로 전기 에너지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선한 영향력을 갖는 사람이 되자’는 우리의 기업 모토처럼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최연진 IT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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