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원주민인 Z세대의 음악 작법은 20세기 아날로그 시대의 음악가들과 다르다. 음악을 만들어 전 세계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플랫폼에 올리고 실시간으로 음악 소비자들과 직접 교류한다. 때론 그렇게 무국적 사이버 세계에서 주목 받아 데뷔하기도 한다. 중학생 때부터 자신의 곡을 만들어 발표하기 시작한 고교생 인디 싱어송라이터 다정(본명 김다정)이 그렇다.
아무런 정보 없이 다정의 데뷔작 ‘Jay Knife’를 듣는다면 한국 가수의 앨범이라 추측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모든 곡의 가사가 영어로 쓰인데다 앨범을 지배하는 감수성이 국내 인디음악의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다. 같은 구절이 반복되는 루프를 기반으로 간단한 악기 편성으로 침대에서 혼자 만든 베드룸팝은 줄리엔 베이커나 피비 브리저스, 매기 로저스 같은 미국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영향력을 느끼게 한다.
최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일렉트릭뮤즈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실제로 줄리엔 베이커와 피비 브리저스 그리고 (이들이 또 다른 아티스트 루시 다커스와 함께 결성한 프로젝트 밴드) 보이지니어스를 비롯해 본 이베어, 도터, 스네일 메일, 사커 마미 등 인디 팝, 인디 포크 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Jay Knife’는 노래와 작곡, 연주, 편곡을 혼자 해내는 다정의 재능이 팔딱거리는 앨범이다. 음악적으로 아직 미숙한 부분은 있지만 성인 음악가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재능이다. 청소년기의 불안과 고민을 주로 이야기하는데 이를 풀어내는 음악적 화법이 꽤나 어른스럽고 능숙하다. 싱어송라이터로서 가능성을 보여주는 앨범이라 할 만하다. 습작 같은 인상의 ‘nighttime’ 같은 곡도 있지만, 조용하지만 깊숙한 독백 같은 피아노 연주와 함께 자신감과 불안감 간의 간극을 고통스럽게 파고드는 ‘pride’처럼 듣는 이를 단박에 사로잡는 곡들도 있다.
다정의 음악적 재능은 부모를 따라 몇 년간 살았던 중국에서 싹이 텄다. 그에게 자극을 준 인물은 미국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였다. “열한 살 때였던 것 같아요. 테일러 스위프트를 좋아하게 되면서 그에 대한 유튜브 영상이나 인터뷰를 찾아봤어요. 팝계에서 아주 성공한 가수이지만 작사, 작곡을 스스로 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알리고 있죠. 스위프트를 좋아하면서 ‘나도 그런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중국에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어릴 때 잠깐 배웠던 기타와 피아노를 다시 치며 노래를 부르곤 했죠.”
아는 코드라곤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학교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기도 했다. 그는 “관객과 교감하는 느낌, 객석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가 너무 좋았다”고 했다.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곡을 쓰고 기타와 아이패드, 노트북을 활용해 혼자서 음악을 만들었다. 이번 앨범에도 담긴 ‘nighttime’은 다정이 그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첫 곡이다.
친구들이 소셜미디어에 일상을 찍어 올릴 때 다정은 자신이 만든 곡들을 하나씩 음악 플랫폼 밴드캠프에 올렸다. 음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가로서 자신만의 역사를 차곡차곡 정리해놓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음악을 올리자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캐나다와 미국에서 한국 인디음악을 알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추천이 역으로 들어와 인디 기획사 일렉트릭 뮤즈의 김민규 대표를 움직였다. 김 대표는 “영미권의 인디팝 음악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친구를 만나는 게 흔치 않은데 음악적 성향이나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 당시 중국에 있던 다정과 연락해 앨범을 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다정은 “정말 내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 내 앨범을 제작하려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앨범에 담긴 10곡은 다정이 2017~2018년 만든 곡 중에서 골랐다. 다시 녹음한 곡도 있지만 대체로 원본을 크게 바꾸지 않았다. 다정은 앨범에 외국 땅에서 불안한 중학생 시기를 보냈던 당시의 마음을 담았다. 그는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이 모든 곡을 관통하는 듯하다”고 했다. “해외 생활로 인한 것도 있지만 나와 관련한 모든 것이 불확실해 보였어요. 음악을 평생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인간관계도 잘 하고 있는지 확실치 않고요.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 내 신념이 옳은 것인지 고민이 많았죠.”
2년 전 한국에 돌아온 다정은 지금 고3이다. 낯선 학교 환경에 적응하고 입시 준비를 하느라 귀국해선 음악 작업을 거의 하지 못 했다고 한다. 일단은 대학 진학 후로 미뤄뒀다. 성인이 된 다정은 어떤 음악을 하게 될까. 그는 “음악 작업을 할 시간이 나지 않아 아쉽긴 하지만 틈날 때마다 아이디어를 적어놓고 있다”며 “장르를 단정하기 어려움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음악은 저를 구원해주는 존재였고 지금도 그래요.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는 일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음악이 나를 구해줬죠. 음악이 없었다면 저 자신에 대한 신념도, 인생에 대한 가치관도 제대로 갖지 못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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