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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복판에 나부낀 '공화 만세'의 깃발

입력
2021.04.23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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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 한성정부 출범

1919년 4월 2일 한성 임시정부 출범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린 인천 자유공원. 독립기념관 제공

1919년 4월 2일 한성 임시정부 출범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린 인천 자유공원. 독립기념관 제공

1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둔 1918년 1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의회 연설로 밝힌 '14개 조 평화 원칙'의 키워드인 '민족 자결'은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피력한 반제국주의 이념이기도 했다. 그해 11월 1차 대전이 연합국 승리로 끝났고, 이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오스만제국이 분해되고, 라트비아 등 구러시아제국 일부도 독립했다.

세계사적 변화에 아시아 아프리카 피식민인들도 한껏 고무됐다. 1910년 일제 강제합병으로 억눌려 있던 조선의 1919년 3·1운동과 조선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진 독립 봉기도 그 여파였다. 독립운동 진영들이 저마다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1919년 3월 17일의 블라디보스토크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 4월 11일의 상하이 임시정부, 4월 23일 경성에서 선포된 한성정부가 대표적이었다.

외국인 거주 치외법권 지역인 인천 자유공원(당시 만국공원)과 서울 종로에서 '국민대회'를 치러 출범한 한성정부는, 도산 안창호의 주장처럼 정통성 면에서는 단연 우세했다. 형식적이나마 13도 대표들이 모여 공화적으로 구축한 정부였기 때문이다. 지도부는 미리 수배해둔 차량에 '공화만세(共和萬歲)'란 깃발을 달고 사대문 안을 누비며 임시정부 출범 선포 유인물을 배포하는 대담한 이벤트까지 전개했다. 이후 그 소식이 당시 미국 최대 통신사였던 연합통신(UP, UPI 전신)에 실리면서, 한성정부 수립을 세계에 알렸다.

소수의 명망가들 중심으로 급조된 정부조직들이어서 요직 인사가 겹치는 예가 많았고, 결정들이 서로 충돌하고 '외교적' 혼선도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각 정부 대표단은 협의 끝에 활동 편의 면에서 유리한 해외정부를 실질적 대안으로 합의했고, 그 결과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상하이임시정부를 뼈대 삼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건국 주역으로 참여한 '조선건국동맹'의 몽양 여운형은 구체제 말기에 잠깐 쓰인 '대한(제국)'을 포함시킨 임시정부 국호를 한사코 못마땅해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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