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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모던, 오르세 안 부럽다... 버려진 공간에서 미술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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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모던, 오르세 안 부럽다... 버려진 공간에서 미술관으로

입력
2021.04.19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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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보관소, 쓰레기소각장, 우체국 등
방치됐던 곳 전시장으로 재탄생
과거 흔적 곳곳에... 공간 자체가 볼거리

과거 석유를 보관하던 곳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19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원유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당시 정부는 비상사태에 대비해 1978년 매봉산 인근에 석유비축기지를 세웠다. 이후 2002 한일월드컵 개최를 위해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인근에 지어지자 석유비축기지는 위험시설로 분류됐고, 2000년 12월 폐쇄된 채 사실상 방치돼 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과거 석유를 보관하던 곳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19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원유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당시 정부는 비상사태에 대비해 1978년 매봉산 인근에 석유비축기지를 세웠다. 이후 2002 한일월드컵 개최를 위해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인근에 지어지자 석유비축기지는 위험시설로 분류됐고, 2000년 12월 폐쇄된 채 사실상 방치돼 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광주 서구 화정동에 위치한 옛 국군광주병원. 이곳은 2007년 병원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최근까지 도심 속 폐허로 남았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새 생명을 얻었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제13회 광주비엔날레 전시의 일환인 5·18민주화운동 특별전(메이투데이)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과거 병원이었던 사실을 알게 하는 뽀얗게 먼지 쌓인 ‘외진 접수’ 간판과 함께, 5·18민주화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예술 작품이 어우러지면서 인상적인 공간이 됐다.

오래되고 낡은 건물 자체가 또 하나의 전시물로서 볼거리를 제공하는 곳이 적지 않다. 원래의 기능을 상실, 버려지고 방치됐던 공간들이 미술관으로 재탄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까닭이다. 화력발전소와 기차역을 각각 개조해 만든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 미술관과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 기차역을 개조해 만든 것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 기차역을 개조해 만든 것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마포석유비축기지, 금지구역에서 문화공간으로

지난 14일 찾은 문화비축기지에는 길을 따라 산책하는 시민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1급 보안 시설로 40년 넘게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곳이었지만 2017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서울 성산동 서울월드컵경기장 맞은편에 자리한 이곳은 과거 서울 시민이 한 달간 사용할 수 있는 석유를 보관하던 곳. 2000년 말 폐쇄됐고, 10년 이상 사실상 방치돼 오다 지난 2017년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석유를 보관하던 아파트 5층 높이의 탱크들은 공연장, 전시실로 변했다.

문화비축기지 T5 전시실. 석유로만 채워졌던 공간이 전시실로 탈바꿈하면서 360도 스크린에서 영상물이 재생되고 있다. 채지선 기자

문화비축기지 T5 전시실. 석유로만 채워졌던 공간이 전시실로 탈바꿈하면서 360도 스크린에서 영상물이 재생되고 있다. 채지선 기자


과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공간 자체의 아우라를 뿜어낸다. 전시장(T5) 1층 입구에서 맞닥뜨린 문구가 인상 깊었다. 문화비축기지의 올해 첫 기획전 ‘내가 쏜 위성’ 전시가 진행 중인 이곳 1층 출입문에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석유비축기지 경비대에서 근무하던 이의 말이 적혀 있다. “예전엔 여기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 못 했어. 계측하다가 헛디뎌서 떨어지면 들어갔으려나. 죽어서나 들어가는 곳이지(웃음). 여기 들어오니 기분이 묘하네.” 온전히 석유로만 채워졌던 공간, 그래서 특수 상황 외에는 근무자들이 들어갈 일이 없던 이곳은 현재 영상물 전시가 한창이다.

기획전 ‘내가 쏜 위성’은 전시가 이뤄지고 있는 이 공간이 예전에 무엇을 하던 곳인지를 선명히 보여주는 내용이어서 흥미를 부추긴다. 1970~80년대 한국석유공사 직원의 월급봉투부터 석유비축기지가 시설 폐쇄 절차를 밟게 됨에 따라 작성된 기지종료에 관한 업무보고 문서를 볼 수 있다.

쓰레기소각장, 우체국 건물도 전시공간으로

옛 창전동우체국 건물을 전시공간으로 꾸민 '탈영역우정국'의 전경. 운영시간은 통상 오후 1시부터 7시까지인데, 행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주최 측에 문의가 필요하다. 채지선 기자

옛 창전동우체국 건물을 전시공간으로 꾸민 '탈영역우정국'의 전경. 운영시간은 통상 오후 1시부터 7시까지인데, 행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주최 측에 문의가 필요하다. 채지선 기자


같은 마포구엔 우체국 건물을 전시공간으로 꾸민 ‘탈영역우정국’도 있다. 민간 문화예술 사업자인 리니어콜렉티브가 우체국통폐합으로 유휴공간이 된 옛 창전동우체국 건물을 임대해 2015년 6월부터 전시를 진행하고 있는 곳이다. 우체국 업무공간이었던 1층과 관사로 썼던 2층, 지하 공간은 모두 작품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짙은 살색의 외벽과 건물 내부의 금고문 등은 그대로다. 탈영역우정국 관계자는 “다양한 소통과 교류의 장이 되는 게 목표”라며 “’탈매체, 탈장르라는 지향성을 가지고 변화하고 진화해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현재 이곳에서는 서울을 주제로 한 ‘해시태그. 서울’ 전시(25일까지)가 진행되고 있다. 애증의 공간인 서울을 현대작가 7명이 다양하게 해석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지하 공간에 마련된 김현주 작가의 ‘보행도시 v.2’의 경우 작은 로봇이 전시 공간 내 지하 터널을 천천히 이동하는 장면과 함께, 작가가 서울이라는 도시를 걸으며 채집한 소리와 인터뷰를 중첩시킨 영상을 틀어 놓았다. 영상 속 치열하게 살고 있지만 서울 하늘 아래 몸 누일 성한 곳 하나 마련하기 쉽지 않은 청년의 애환을 담은 인터뷰는, 지하 공간이 주는 특유의 냄새와 습함과 어우러지면서 발길을 붙잡는다.

부천아트벙커B39 전경. 소각장이었던 흔적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채지선 기자

부천아트벙커B39 전경. 소각장이었던 흔적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채지선 기자


쓰레기소각장이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된 곳도 있다. 경기 부천시 삼정동에 위치한 ‘부천아트벙커B39’다.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버려진 공간이던 이곳은 2018년 6월 예술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쓰레기 반입실, 저장고, 소각장은 모두 전시나 공연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재를 퍼올리던 크레인 등을 그대로 살려 공간 자체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부천아트벙커B39 내 전시 공간. 원래는 쓰레기를 소각하던 곳이다. 채지선 기자

부천아트벙커B39 내 전시 공간. 원래는 쓰레기를 소각하던 곳이다. 채지선 기자


다만 올 들어 운영 주체가 부천문화재단으로 바뀌면서 현재 일부 공간만 오픈해 운영 중이다. 지금은 1층에서 양정욱 작가의 전시 ‘대화의 풍경: 우리는 가끔씩 휘어지던 말을 했다’만 진행하고 있다. 부천아트벙커B39 관계자는 “내년 7월쯤이면 공간에 대한 공사가 마무리돼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시 공간으로 각광... 지속적 활용 방안 고민해야

현재는 휴관 중이지만 가 볼 만한 공간들도 꽤 있다. 서울 여의도공원 인근에 위치해, 지나가면서 한 번쯤은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해했을 법한 ‘SeMA벙커’가 그중 하나다. 1970년대 대통령 경호용 비밀시설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2017년 10월부터 서울시립미술관의 또 다른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4월 30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과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새로운 전시 '있지만 없었던'이 시작된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들의 노동과 일상을 드러낸 200여 점의 사료와 노동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20여 점의 현대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폐수처리장과 찜질방을 각각 개조해 만든 고색뉴지엄(수원)과 소다미술관(화성)도 방치된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곳들이다.

조은정 고려대 초빙교수(미술평론가)는 “코로나19 상황으로 많이 모이지 못해 지금으로선 방문객이 적을지 모르지만, 굉장히 핫한 장소들”이라며 “새로운 공간에 대한 경험까지 제공할 수 있는 곳들이어서 좋은 전시, 좋은 프로그램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해서 잘 활용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채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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