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징거림'으로 치부되는 여성의 고통

이전기사

구독이 추가 되었습니다.

구독이 취소 되었습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징징거림'으로 치부되는 여성의 고통

입력
2021.04.17 04:40
0 0

<14>엄살이라는 말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남성 의사-여성 환자의 구도 안에서 여성의 고통은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는 것, 엄살인 것, 이득을 위한 것, 정신력의 문제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림은 앙드레 부르이에 작. '살페트리에르의 임상수업'(1887)

'조퇴'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직도 마음이 부대낀다. 아프지만 아프다고 말하기 두려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손으로 스스로 머리를 짚으며 열이 얼마나 나는지 가늠하던 기억들. 이 정도면 아픈 게 맞을까? 조퇴할 만한가? 아프다고 말했는데 꾀병 부리지 말라고 혼나면 어떡하지? 사실 이것은 엄살인 걸까? 아니 무엇보다 몸 관리를 잘못했다고 혼이 나면 어쩌지? 이런 고민을 끊임없이 몇 시간째 하다 보면 어느새 조퇴할 타이밍을 놓치고 하교할 시간이 되곤 했다.

삼십대가 된 후에도 고통을 말하려고 하면 여전히 부대낀다. 상처받을까봐 두렵다. 믿어주지 않는 상황을 마주치는 건 항상 상처이니까 차라리 피하고 싶다. 얼마 전 들은 트라우마 강의에서는 이런 말을 들었다. “이해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성격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 상황이 반복되었던 거죠.”

2019년부터 지금까지 2030 여성들의 우울증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취재하러 다니고 있다. 여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할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이 작업을 하는 이유는 이들의 고통을 믿어주기 위해서라고. 고통의 옹호자가 되기 위해서라고.

게티이미지뱅크


구강내과에서 항불안제를 처방하다

인터뷰이 중에 많은 수는 우울증과 함께 신체적 만성질환을 함께 경험한다. 혹은 반대로 이러한 만성질환을 앓기 때문에 우울증이 온 것일 수도 있다. 여성이 겪는 만성 질환은 진단이 늦어지고 치료가 어려운 경향이 있다. 대표적으로 섬유근육통 환자는 첫 증상을 경험한 뒤 진단을 제대로 받기까지 평균 2.3년이 걸리고 3.7명의 의사를 거치며 환자의 84%는 여성이다.

다발성 경화증, 과민성대장증후군, 측두하악장애 등도 여성에게 흔하며 정확한 진단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렵사리 진단명을 얻고 난 뒤에도 원인이 무엇인지 불분명해 완치가 어렵다.

나 역시 측두하악장애(TMD, Temporomandibular disorder)로 오래 고생하고 있다. 2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턱에서 딱딱 소리가 나고, 스트레스가 심할 때에는 입이 제대로 벌어지지 않았다. 5~6년을 그냥 방치해오다가 증상이 극심해진 작년 3월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처음 생각했다. 석사 논문의 초고를 쓸 때였고, 애인과 지리멸렬한 싸움 끝에 헤어진 때였으며, 여성 인터뷰이 중 한 명이 자살한 때였다.

밤새 자는 동안 치아를 어찌나 꽉 세게 물었던지 일어나면 턱이 얼얼했다. 이러다간 머지않아 어금니가 몽땅 갈려나갈 것 같았다. 두통도 심했다. 치과를 방문했으나 제대로 된 처방을 얻지 못하고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는 둥, 스트레스받는 상황을 피하라는 둥(그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의 말만 들었다. 고민하다가 치의학, 그중에서도 여성 건강에 관심을 두고 공부를 하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울대학교 치과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김예지 전공의는 내게 치아 사이에 손가락 두 개를 넣어보라고 하더니 안 들어간다고 하자 심각하다며 치과에서도 잘 모르니 구강내과를 찾아가라 했다.

근처 구강내과에 가서 접수를 하니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 전 필요하다며 테스트지를 건넸는데 테스트지 내용을 보아하니 이곳이 구강내과인지 신경정신과인지 헷갈려졌다. 테스트지의 문항은 이랬다. “다음 문항에 대해 ‘매우 그렇다/그렇다/보통이다/아니다/전혀 아니다’로 표시하시오./머리가 아프다/신경이 예민하고 마음의 안정이 안 된다/쓸데없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누가 내 생각을 조정하는 것 같다/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 같다/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

구강내과는 확실히 일반 치과보다는 전문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명쾌한 결론을 내주는 것도 아니었다. 의사는 내 입이 벌어지는 정도를 자로 측정하며 이것저것 생활 스트레스와 불안감 정도를 물은 뒤 근육이완제와 함께 항불안제(!)를 처방했다.

김예지 전공의는 측두하악장애가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는데 골치만 아픈 답 없는 질환”이라고 말했다. 치과 의사들도 이 질환을 잘 모르는데 이유는 첫째, 원인이 너무 여러 개이고 둘째, 치의학의 시초가 외과적이라 측두하악장애와 같은 내과적 문제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지며 셋째, 뼈가 아니라 근육 혹은 디스크의 문제일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가 아니어서 환자의 서술에 의존해야 하는데 여성의 증상 호소를 그냥 징징댄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측두하악장애는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훨씬 흔하다. 단국대 치대 구강내과학교실의 연구는 턱관절장애로 병원을 찾는 환자의 무려 99.8%가 여성이며 그중에서도 20대의 유병률이 가장 높다고 보고한 바 있다.


신체증상을 호소하는 여성 환자는 자주 이득을 보기 위해 꾀병을 부리는 환자로 묘사된다. 그림은 2021년에 출판된 '최신정신의학' 421쪽에서 따옴.


여성은 더 오래 자주 아프다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는데 골치만 아픈 답 없는 질환”, “원인이 너무 여러 개”, “여성의 증상 호소를 그냥 징징댄다고 봄”. 이것은 여성이 자주 앓는 질환에 붙는 단골 멘트다. 여기에 몇 가지가 더해지면 레퍼토리가 완성된다. “닥터 쇼핑하는 여자”, “건강염려증”, “환자 역할을 해서 이득을 얻으려 함”, “여성에게 더 흔한 이유는 여성호르몬 때문”, “정신의 문제”.

호르몬은 여성의 건강을 설명할 때 거의 만능키처럼 이용된다. 나의 경우, 호르몬으로 여성 질환을 설명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 질환을 현재 의학이 잘 모르고 연구할 의지도 별로 없다는 것으로 알아듣는다. 호르몬의 영향을 무시해서라기보다는 호르몬을 강조할수록 그 밖에 다른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를 탐구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너무 간편한 해결책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정신과 교과서로 쓰이는 '신경정신의학(2판)'은 신체이형 장애를 건강 염려증 중 하나로 “정상적인 용모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외모가 달라졌거나 추한 모습으로 변했다고 믿는 경우”로 정의한다. 교과서는 질환의 “원인이 미상”이며 “90% 이상에서 우울증을 동반하며, 강박증과 기분장애의 가족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세로토닌 관련 질환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 “정신역동적으로는 성적(性的) 혹은 감정적 갈등이 신체부위로 대치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도 덧붙인다.

성형강국 한국에서 여성이 자신의 외모가 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미상이라니! 성적 갈등이 신체부위에 나타나는 것이라니!

한국의 자살예방정책은 "가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중년의 남성에 집중해 온 경향이 있다. 사진은 중앙자살예방센터 홈페이지의 첫 화면에서 따온 것.


2030 여성의 자살 '성공률'이 높아지고 있다

우울증 역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연령과 관계없이 여성이 남성보다 1.5배~2배가량 흔한 질환이다. 보건복지부가 5년마다 실시하는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에 따르면 사실 정신질환은 중독과 관련한 항목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질환에서 여성이 더 취약하다. 이를 설명할 때도 꼭 여성호르몬이 들어간다. 이렇게 설명할수록 개개인 여성이 처한 구체적인 사회구조적인 맥락은 사라지게 된다.

2030 여성의 높은 자살률을 언급하는 기사마다 남성이 여성보다 자살을 훨씬 많이 하는데 왜 남성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느냐는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본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남성에게서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남성의 자살 '성공률'이 높기 때문이다. 남성은 여성보다 더 치명적인 자살 방법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 보고서는 꾸준히 자살 시도, 자살 사고, 자살 계획 등 자살 관련 행동은 여성이 더 높음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여성이 자살 생각이나 시도는 꾸준히 해왔는데 2030 여성의 자살의 성공률이 이전 세대보다 높아진 것일 수도 있다.

한국의 자살예방정책은 주로 '가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중년의 남성, 혹은 독거 남성에게 집중해 온 경향이 있다. 여성은 자살예방정책의 초점이 된 적이 드물다. 그렇다면 여성은 진짜로 죽지는 않기 때문에 내버려둬도 된다는 것일까? 측두하악장애가 생명에 지장이 가지는 않는, 골치 아픈 질환 정도로만 치부되었던 것처럼?

우울증이 여성에게 흔한 이유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남성이 여성보다 덜 우울한 것이 아니라 여성보다 우울감을 표현하기 어렵거나,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우울증으로 식별되지 않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내 죽지 못하고 아파하는 여성도 돌봐야 하지만, 죽어버리기 전에 끝내 아파하며 살아내도록 남성도 돌봐야 한다.

1년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달인 5월이 오고 있다. 누구의 고통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미나 작가


하미나 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젠더살롱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