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과 현실 융합된 '메타버스'는 20년 이끌 핵심"
MZ세대 '부캐' 욕구에 가상 현실 캐릭터 수요 늘어
캐릭터에 대한 이질감 극복·스토리텔링 필요
# 3D 토끼이자 아티스트 '아뽀키'는 2월 첫 싱글 앨범을 발표했다. 발표곡 '겟 아웃(Get Out)'의 '릴레이댄스 영상(노래 파트마다 순서를 바꿔가며 춤을 추는 영상)'은 공개한 지 1주일 만에 100만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했다.
# 유튜버 '루이'가 강원 강릉시로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담은 브이로그 콘텐츠도 있다. 댓글에는 "거짓말 아냐?" "정말 신기하다" "와, 이게 사람이 아니라고?"라는 반응이 쏟아진다.
그렇다. 루이는 실제 사람이 아닌 '가상인간'이다.
이들은 가상의 유튜버, 즉 '버추얼(virtual) 유튜버'이다. '브이튜버(V tuber)'라고도 불리는 버추얼 유튜버가 국내에서 잇따라 등장하며 주목받고 있다.
버추얼 유튜버는 인공지능(AI) 기술을 바탕으로 가상공간에서 현실의 팬과 소통하고 있다.
버추얼 유튜버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다. ① '버추얼 캐릭터', 3D 그래픽 등으로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가상의 3D 컴퓨터 캐릭터 ②'버추얼 휴먼(가상인간)', 즉 딥페이크 기술(AI 기술 기반의 인간 이미지 합성 기술)의 하나로 가상의 얼굴을 생성해 만들어진 가상인간이 있다.
앞서 미국에서는 'AI 엔젤'을 비롯해 '릴 미켈라(Lil Miquella)' 등의 버추얼 유튜버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광고 모델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릴 미켈라는 2019년 한 해에만 약 130억 원의 수익을 거두며 현실세계의 스타를 능가하는 인기를 끌고 있다.
AI 아이돌로는 미국 라이엇게임즈가 제작한 '케이디에이(K/DA)'가 뮤직비디오 누적 조회수가 4억 뷰를 넘길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보이고 있다.
시공간 초월하는 '메타버스', 팬들과 상호 작용은 '덤'
이러한 버추얼 유튜버, AI 아이돌의 인기에는 메타버스 열풍이 큰 역할을 했다. 가상을 뜻하는 '메타(meta)'와 유니버스의 'verse'를 합친 단어 메타버스(metaverse)는 가상과 현실이 융합된 초현실적인 세계를 뜻한다.
메타버스는 가상세계지만 현실과 상호 작용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엔비디아의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은 앞으로 20년을 이끌어 갈 화두로 메타버스를 꼽았다. 인류가 3차원 가상세계를 기반으로 활동할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가운데 국내외 증시에서 메타버스 관련주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달 10일에는 미국의 메타버스 게이밍 소셜 플랫폼인 로블록스가 뉴욕 증시에 상장한 첫날 주가가 54.4% 급등하면서 뜨거운 관심을 받기도 했다.
메타버스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가상의 캐릭터는 게임 및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단이다.
이미 네이버 자회사 스노우가 개발한 3D 아바타 생성 앱 '제페토(ZEPETO)'는 2019년에 35개 나라에서 무료 다운로드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대형 연예 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 역시 실제 멤버와 3D 그래픽 아바타가 공존하는 콘셉트의 걸그룹 '에스파(aespa)'를 선보이기도 했다.
AI기업이 걸그룹을 만들고 키우는 까닭은
국내 AI그래픽 전문기업 '펄스나인' 역시 AI 걸그룹 '이터니티'로 메타버스 열풍에 올라탔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도 아닌 AI기업이 걸그룹 사업에 뛰어든 까닭에 대해 허인경 펄스나인 마케팅실장은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신생 기업으로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사업이 필요했고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이 아이돌 그룹이라 생각했다"며 "특히 IT 회사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술을 알리는 좋은 수단이라고 본다"고 답했다.
펄스나인은 지난해 3월 가상인물 생성 자동화 프로그램 '딥리얼 AI'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으며, 머신러닝(인공지능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학습하고 훈련하는 기술)을 통해 생김새와 성격, 취미 등이 모두 다른 202명의 가상인물(남성 101명, 여성 101명)을 만들었다.
허 실장은 이어 "이후 지난해 11월 데뷔곡을 준비, 1월에 데뷔곡 '아임 리얼(I'm real)' 뮤직비디오 제작에 들어가 3월 대중에 첫 공개했다"고 덧붙였다.
AI 걸그룹 제작에 1년 가까이 걸린 셈이다.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 조사에 따르면 연습생들의 계약 기간은 평균 3년 2개월 정도인 걸 감안했을 때, AI 아이돌을 제작하여 데뷔시키기까지의 기간은 기존 아이돌 제작 기간과 비교하면 3분의 2 이상 짧다고 볼 수 있다.
펄스나인의 또 다른 관계자는 이를 두고 "AI 아이돌은 기존에 아이돌을 육성하는 데 드는 비용와 시간을 줄이고 실패할 확률을 줄일 수 있다"며 "최근 논란이 컸던 학교 폭력 사건 등 소속 아티스트의 사생활 문제로부터 자유롭다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실제로 대면할 수 없는 가상 아이돌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온·오프라인에서 팬들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8월 열린 'AI 심쿵챌린지 101' 국민투표가 바로 첫 번째 사례다. 101명의 여성 아이돌 멤버 후보 가운데 투표를 통해 선정된 11명으로 이터니티의 최종 멤버를 구성한 것. 1만 명의 참여자와 누적 조회수 12만을 기록했다고 한다.
또 VR 콘텐츠는 오프라인 팬미팅의 대체재다.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에서 열린 '이터니티' 데뷔 쇼케이스 현장에서는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 콘텐츠를 체험해 볼 수 있었다.
VR 기기 속 영상에서는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이터니티의 멤버 '최여름'이 나타났다. 데뷔곡인 '아임 리얼'과 이터니티의 세계관에 대해서 소개했는데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실제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앞서 지난달 22일에 유튜브에서 선공개한 '아임 리얼'의 뮤직비디오를 두고 '오싹하다', '부자연스럽고 기괴하다' 등의 누리꾼들의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의식한 듯 쇼케이스 현장에서 다시 공개한 이터니티 멤버들의 얼굴은 한 단계 자연스럽게 구현된 모습이었다.
펄스나인 관계자 역시 "현재는 시도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미흡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계속 보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버추얼 아티스트 '루이'는 AI 기술 회사가 버추얼 아티스트를 제작한 또 다른 사례다. '루이'는 가상얼굴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다. 오랜 가수 지망생이었던 그는 외모 강박으로 슬럼프를 겪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루이'를 제작한 오제욱 디오비스튜디오 대표는 신체적 결함이 있는 지원자에게 무료로 성형을 해준 프로그램 '렛미인'에서 영감을 받았다며 "실력과 잠재력이 있지만 외모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하는 아티스트에게 제2의 얼굴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오 대표는 "회사의 입장에서 버추얼 아티스트는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이점이 있고, 회사에 초상권이 귀속돼 광고 모델 등으로서도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 '부캐'로 또 다른 자아 찾는 MZ세대
한편 1인 미디어 시장 속 버추얼 유튜버의 등장은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 사이에서 온라인 공간 속 가상의 자아를 만들고자 하는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한국게임학회장인 위정현 중앙대 교수는 "MZ세대는 온라인 공간에서 현실의 자신과는 다른 '부캐(한 사람이 다양한 캐릭터를 가지고 각각에 맞는 활동을 하는 것)', 즉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간다"라고 말했다. "이전에는 페이스북과 같은 텍스트 공간에서 이뤄졌다면 그것이 유튜브라는 영상의 영역으로 옮겨 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특히 기성 세대는 현실과 가상의 자아가 분리되는 것을 낯설어 하지만 MZ세대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며, 앞으로도 게임 속에서는 아바타, 유튜브에서는 버추얼 유튜버로 제 2의 자아를 만들고 즐기려는 욕구가 꾸준히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형 버추얼 유튜버, AI아이돌 성공하려면
한국의 버추얼 유튜버, AI 아이돌 시장은 걸음마 단계다. 성공과 실패를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이르다.
낮은 캐릭터 수용도와 이질감 극복 필요
위 교수는 두 가지 문제점을 우려했다.
① 한국인의 낮은 캐릭터 수용도
그는 한국 사람들이 캐릭터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장벽이 있다고 말했다. 2007년에 데뷔한 일본의 상징적 캐릭터 '하츠네 미쿠'는 음성 합성 소프트웨어인 보컬로이드를 이용해 만든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버추얼 가수이자 캐릭터다. 일본의 버추얼 아이돌계의 굵직한 역사를 남기며 해마다 콘서트에 300만 명을 동원할 정도의 인기 스타다.
위 교수는 "우리 나라에서는 '하츠네 미쿠'의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일본은 캐릭터를 인간처럼 여기며 친밀감을 느끼는 데 비해 한국은 그런 경향이 다소 적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형상이 아닌 버추얼 캐릭터가 한국에서 대중적 파급력을 가질지는 미지수라는 것. 한국은 여전히 실제 인간 연예인과 교감을 더 보편적으로 여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② 이질감 없는 기술 구현
딥페이크 기술이 적용된 '버추얼 휴먼'의 경우 이질감을 덜 느끼는 방향으로 기술력이 최대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대한 실제 인간의 얼굴과 가깝게 구현해 내는 기술력이 필요하다는 것. 삼성의 '네온', LG의 '김래아'와 같은 가상 인간이 대중에 처음 공개되었을 때 반응이 차가웠던 이유도 바로 '불쾌한 골짜기(로봇이 인간을 어설프게 닮을수록 불쾌함이 증가한다는 이론)' 때문이었다.
'진짜 같은 가짜 인간'을 표방한다면 인간의 모습과 100% 가깝게 구현해 대중의 호감도를 사야 한다는 것이다.
본질은 '스토리텔링'…캐릭터에 생명력 불어넣어야
그러나 위 교수는 무엇보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답했다. 그는 지난해 엔씨소프트의 클랩에서 개발한 '유니버스'를 사례로 들며 "실제 아이돌의 음성과 AI 기술을 결합해 팬들에게 커스터마이징(개인화) 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단순히 본뜨기만 하는 것은 기존 팬들에게 반발심만 가져다 준다"고 말했다.
새로운 팬덤을 형성하고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그 캐릭터만이 가진 고유한 매력과 개성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위 교수의 입장이다.
아울러 그는 VR를 언급하며 "VR산업의 발전이 미미한 까닭은 그 산업이 뜰 만한 킬러 콘텐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새로운 기술에 대해 대중이 신기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으려면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이 계속해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AI·딥페이크 둘러싼 윤리적 문제는 숙제
기술 발전에 따른 오남용의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난해 AI 챗봇 '이루다'의 성희롱, 개인정보 침해 등 논란은 AI 윤리 정립의 필요성을 일깨웠고 딥페이크 기술은 음란물 합성, 가짜 뉴스 등 각종 정치·사회 문제로 번진 게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가상 캐릭터, 가상 인간 역시 AI와 딥페이크 방식을 이용하는 만큼 세심한 기술 설계가 늘 뒷받침되어야 한다. '릴 미켈라'의 경우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BlackLivesMatter"을 표기하며 흑인 인권 운동에 동참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가상 인물이 단순히 엔터테인먼트나 마케팅이 아닌 정치·사회적 영역으로도 활동 반경을 넓혀 가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 발전과 동시에 윤리적, 도덕적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는 방향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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