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연쇄강간범 제우스가 그리스 최고 神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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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연쇄강간범 제우스가 그리스 최고 神인 까닭

입력
2021.04.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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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저항하는 여자는 괴물이 된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화가 앨리스 파이크 바니의 '메두사'. 1892, 스미소니언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 홈페이지


자녀들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히기가 꺼림칙하다는 분들이 많다. 살인, 성폭력, 불륜 등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인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최고신 제우스가 연쇄 강간범인데다가 여성들이 남성 신과 영웅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각종 폭력에 조연으로 소비되는 점은 문제가 많다. 그리스 신화는 왜 이렇게 성폭력으로 가득 찬 것일까?

신화는 역사 이전의 집단 기억이다. 신화를 뜻하는 그리스어 ‘뮈토스(Mythos)’는 원래 ‘이야기된 것’, ‘구전된 것’을 뜻한다. 문자가 없던 시대,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고 외워서 전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기억했다. 그리스 신화도 마찬가지다. 오랜 세월 동안 자기네 민족이 겪었던 사건을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후손에게 전하면서 형성되었다. 거기에 다른 민족의 신화와 역사도 흡수했다.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동해서 원주 민족이 살고 있던 그리스 반도와 지중해 지역을 침략하고 지배하는 과정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의 조상은 발칸 반도 북쪽에 살다가 기원전 2000년과 1200년경 사이에 현재 그리스 지역으로 왔다. 이들은 스스로를 헬레네 민족이라 부르고 제우스를 최고신이자 신들의 아버지로 삼아 신화를 재편성한다. 당시 그리스인들의 가족 제도인 강력한 가부장제를 반영해 신들의 관계를 혼인이나 부모 자식 관계로 정리한다. 신들의 계보는 기원전 7세기경에 헤시오도스가 '신통기'로 정리하여 완성된다. 참, 헬레네 민족이란 명칭은 프로메테우스의 손자인 헬렌을 시조로 모신 데에서 유래한다. 트로이 전쟁의 미녀 헬렌이 아니다.

기원전 5세기 에트루리아 벌치(현재 이탈리아 로마 북부)에서 발견된 헤라와 프로메테우스가 그려진 원형 부조. 위키피디아


헤라, 데메테르, 아프로디테는 원래 원주 민족의 여신

헬레네 민족이 오기 전, 그리스와 지중해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은 여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헤라 여신은 그리스 반도의 대지 모신(母神)이었고 데메테르는 시칠리아의 농업 여신이었다. 아프로디테는 키프로스 섬의 여신이었다. 이들 각 지역을 정복해간 헬레네 민족은 원주민의 신들도 제우스에게 복속시키려 했다. 제우스와 여러 여신들의 공식 결혼이나 비공식적 결합을 추진했다. 원주민이 믿는 여신들을 결혼을 통해 가부장에게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인간 여성의 경우처럼. 그러다 보니 제우스는 여러 여신과 관계하는 바람둥이가 되어 버렸다. 싫다 하는 여신들에게 제우스가 속여서 접근하거나 반강제로 성관계하는 신화 속 장면에는, 헬레네 민족이 저항하는 원주 민족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실제 역사가 반영된 셈이다.

원래 제우스는 비, 바람, 번개, 천둥과 같은 기후를 담당하는 날씨의 신이었다. 여러 신들 중 한 명일 뿐인 날씨의 신이 능력을 키우는 과정은 그리스 신화의 내용에 반영되어 있다. 제우스는 먼저 지혜의 여신 메티스를 삼켜서 지혜를 얻는다. 메티스는 제우스 안에서 현명한 조언을 해준다. 메티스는 임신 중이었기에 딸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 속에서 태어난다.

이어서 제우스는 율법과 질서의 여신 테미스와 결합해 우주와 인간 세상의 질서를 지배하게 된다. 둘 사이에서 계절의 여신인 호라이 세 자매와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 세 자매가 태어난다. 제우스는 점점 강력해진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와 결합해 9명의 뮤즈를 낳아 시간과 역사, 문학, 학문도 주관한다. 데메테르와 결합해 페르세포네를 낳아 농업신 기능도 흡수한다. 드디어, 그리스의 가장 강력한 대지 모신인 아르고스의 헤라와 정식 결혼을 하여 그리스 최고 신이 된다.

전차 위의 제우스. 위키피디아


제우스가 바람둥이로 묘사된 이유

결혼과 성관계를 통해 제우스에게 종속되면서 여신들이 원래 가졌던 긍정적인 능력과 역할, 특성도 제우스에게 속하게 된다. 한편, 제우스에게 권능을 빼앗긴 여신들은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헤라의 경우를 보자. 최고 여신인데도 헤라는 남편 제우스에게 무기력하고 질투에 눈멀어 잘못 없는 여성을 죽이는 등 부정적 모습을 보인다.

이는 여성이 하등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단지 헤라가 침략당한 피지배 민족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승자의 신화에서 패배한 쪽은 하급 신의 수준으로 격하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헤라는 원래 농업을 주관하는 대지 모신이었기에 주기적으로 바가지를 긁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요란스레 부부싸움을 해야 천둥 번개가 치고 농사에 필요한 비를 내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여신들은 당시 강력한 가부장제 아래 여성이 하급 인간으로 취급받던 그리스의 현실을 반영한 모습으로 신화에 등장한다. 아테나의 경우를 보자. 지혜의 여신이라면서 아테나는 아버지 제우스가 강간한 피해 여성들을 벌주고 남성 영웅들을 지원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성의 이익에 부합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성이 지혜로운 여성으로 숭상받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에서 남성은 한 여성을 선택하여 권력을 일부 나눠준다. 그 여성을 이용해서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다른 여성들을 다스리면 편리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어서가 아니다.


영웅 페르세우스에 의해 참수되는 순간을 그린 화가 카라바조의 '메두사'. 1597, 위키피디아


저항하고 강간당한 여신, '메두사'

그럼 저항하는 여성은 어떻게 될까? 여기 메두사가 있다. 메두사 역시 고대 그리스 지역 원주민이 믿던 여신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메두사라는 이름의 뜻이 ‘지배자’ ‘여왕’이라는 점으로도 짐작이 간다. 신화에 등장하는 메두사는 뱀으로 된 머리카락을 가진 괴물이다.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몸도 뱀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원래 아름다운 인간 여성이었던 메두사는 아테나 여신의 저주를 받아 괴물로 변했다.

저주를 받은 이유로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진다. 그 중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의하면, 메두사가 포세이돈의 구애를 거절하다가 아테나 신전에서 강간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관계를 통해 가부장 관계에 포섭되지 않고 저항하다가 강간당하는 여신 메두사. 잘못은 남신 포세이돈이 했지만 인간 여성 메두사를 벌하는 가부장제의 수호자 아테나. 결국 메두사가 뱀 괴물이 된 이유는 끝까지 저항을 했기 때문이다.

메두사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 괴물들의 모습은 뱀이나 새와 관련 있는 경우가 많다. 스핑크스는 여자의 얼굴에 사자의 몸,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괴물이다. 세이렌은 아름다운 인간 여성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하고 있다. 크레타의 뱀 여신 조각상들에서 알 수 있듯, 뱀과 새는 고대 지중해 지역 여신의 상징이다.

이 역시 패배한 민족의 여신이 신화에 괴물로 기록된 예다. 이후 서양의 이야기에서 전사 남성은 용(날개 달린 뱀 = 여성 괴물 = 패배한 고대 여신)을 죽이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남성 영웅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래서 메두사를 죽인 남성 페르세우스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 용 퇴치자(dragonslayer) 전설의 시조이기도 하다.

크레타섬의 '뱀의 여신상'. 뱀은 대지의 생명력, 풍작을 상징했다. 위키피디아


가부장 권위에 도전한 여성, '괴물'로 불린다

그리스 신화는 헬레네 민족이 여신을 숭배하던 그리스의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신화를 남신 제우스 위주로 재편성한 실제 역사를 반영한다. 고대 그리스 지역을 침략한 자들은 자신들의 지배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피지배 민족의 여신을 복종시키고자 제우스를 연쇄성폭력범으로 만들었다.

제우스 아닌 남신들과 남성 영웅들도 성폭력을 일삼고 여성 괴물들을 죽였다. 이는 신적인 존재나 영웅이라면 당연한 행동이 아니다. 여성들이 나약해서도 아니다.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의 이익을 위해 기록했느냐에 달린 문제다. 침략자들에게 용감하게 저항한 여성들이 괴물로 기록된 것이 단적인 예다.

이상의 설명을, 그리스 신화를 읽는 아이들에게 해주자. 신화는 이야기로 기억된 역사라는 것을. 그동안의 역사와 이야기는 한쪽 성별의 입장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하지만 이야기란 언제든지 다시 해석되고 새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덧붙임 : 저항하는 여자를 괴물로 만드는 유구한 역사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젠더 문제에 대해 여성이 쓴 글에 본문 내용과 상관없이 “메퇘지 쿵쾅쿵쾅”이란 댓글이 달리는 것이 그 예다. ‘메퇘지’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메갈리아’에서 활동하던 회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현재는 모든 페미니스트를 혐오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한편, 기존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에 ‘멧돼지’로 불린 인물로 16세기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가 있다. 1520년, 그는 교황 레오 10세가 보낸 문서를 받는다. '주여 일어나소서(Exurge Domine)'라는 그 문서는 파문을 경고하면서 루터를 “주님의 포도밭에서 날뛰는 멧돼지”로 표현한다. 과연 루터는 멧돼지답게 기존 권위를 들이받고 새 시대를 열었다.


박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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