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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안합니다"… 세 모녀 비극 현장엔 시든 조화 두 다발뿐

입력
2021.04.06 15:15
수정
2021.04.06 18:27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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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하얀색 프리지어·카네이션으로 추모
"피의자 향한 공분 크지만 본질 잊힌 것 아닌지"

세 모녀가 사망한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에 5일 추모 문구와 꽃이 놓여 있다. 윤한슬 기자

세 모녀가 사망한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에 5일 추모 문구와 꽃이 놓여 있다. 윤한슬 기자

'민안합니다. 하늘에서라도 편히 쉬세요.'

세 모녀가 비극을 맞은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 이들이 오순도순 살았던 집, 이제는 참혹한 범행 현장으로 남은 그 집에 5일 찾아갔을 때 집 앞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희생을 애도하는 문구와 함께 조화 두 다발이 놓여 있었다. '미안합니다'를 잘못 쓴 듯한 추모 문구엔 영어도 적혀 있어 외국인임을 짐작게 했다. 꽃다발은 죽은 이를 그릴 때 사용하는 하얀색 프리지어와 카네이션, 그리고 장수를 의미하는 불로초로 이뤄져 있었다. 세 모녀가 하늘에서라도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듯 했다.

며칠 전 놓였는지 시든 꽃다발 외에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증표는 그곳에서 더 찾아볼 수 없었다. 출입문을 도배한 경찰의 폴리스라인만이 그날의 참혹함을 대변했다.

지난달 25일 세 모녀의 비극이 세상에 알려진 지 열흘 넘게 지났다. 그 사이 피의자를 향한 분노가 극에 달하면서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 명을 훌쩍 넘겼고, 경찰은 여론과 범행의 잔혹성 등을 감안해 5일 피의자 김태현(25)의 신상정보를 공개했다.

세 모녀가 숨진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고 한켠에 누군가 두고 간 꽃 두 다발이 놓여 있다. 윤한슬 기자

세 모녀가 숨진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고 한켠에 누군가 두고 간 꽃 두 다발이 놓여 있다. 윤한슬 기자

김태현이 60대 여성과 20대 두 딸을 살해하기까지의 정황도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올해 초부터 큰딸에게 일방적으로 교제를 요구해왔다는 그는 지난달 23일 배달기사로 위장해 세 모녀의 집에 침입, 이들을 순차적으로 살해했다. 범행 후 저장 기록을 삭제하려고 했던 휴대폰에는 '급소' 등을 검색한 기록이 남았다고 한다. 김태현이 이틀 뒤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시신 옆에 머물면서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시는 엽기 행각을 보였다는 소식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웃들은 "배달기사로 위장했다는데 무서워서 살겠나" "그 집엔 올라가 보지도 않는다"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공분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러나 '게임광' '스토킹' '자해' '배달기사 가장' 등 자극적 요소 위주로 사건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세상은 범행의 잔인성에 집중할 뿐 이번 사건이 어쩌면 '예고된 비극'일 수 있다는 점에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 양상이다. 특히 큰딸이 지속적인 스토킹 피해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외부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채(혹은 못한 채) 혼자 감당해야 했는지,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책임은 없는지는 오래 곱씹어볼 대목이다.

'민안합니다.' 세 모녀 집 앞의 서툰 추모문과 하얀 꽃이 우리 사회가 어떤 중요한 질문을 잊은 채 이번 사건에 몰입하고 있는지를 조용히 일깨우는 듯하다.

윤한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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