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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지도 않은 소설이 내 이름으로 발표됐다고?

입력
2021.04.06 04:30
수정
2021.04.07 12:47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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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이것은 내가 쓴 소설이 아니다'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 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매주 한 편씩,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천경자의 '미인도'는 1991년 처음 공개된 후 30년이 넘게 진위 여부를 놓고 위작 시비에 휩싸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천경자의 '미인도'는 1991년 처음 공개된 후 30년이 넘게 진위 여부를 놓고 위작 시비에 휩싸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 미술 역사상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둘러싼 가장 유명한 논쟁은 고 천경자(1924~2015) 화백의 ‘미인도’일 것이다. 1991년 처음 공개된 후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냐"며 위작임을 주장한 천 화백과 진품임을 주장한 미술계 사이의 논쟁이 무려 30년 넘게 지속됐다. 이 같은 위작 시비는 미술계에서 흔한 일이다. 모두가 진짜라는데 화가만 가짜라고 믿는 경우도 있고, 모두가 가짜라는데 화가만 진짜라고 믿는 경우도 있다.

문학은 어떨까. 표절이나 대필은 빈번하지만, 작가가 자기 작품의 진위를 가려야 하는 일은 흔치 않다. 만일 작가만의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한 예술적 특징을 모사한 소설이 등장한다면, 작가는 무엇으로 그 소설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까. 자음과모음 48호에 실린 김경욱의 단편소설 ‘이것은 내가 쓴 소설이 아니다’는 이런 상황에 처한 한 소설가를 통해 문학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해 질문한다.

29년차 소설가 A는 어느 날 동료 소설가 B로부터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신작이 한 잡지에 실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처음에는 동명의 신인 작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잡지에 함께 실린 자기소개는 A가 늘 써오던 그것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A가 쓴 것으로 오인 받고 있는 작품은 소설가가 주인공인 이른바 ‘소설가 소설’이다. 주인공 소설가가 작품에서 하는 말들은 모두 A가 평소 떠들고 다니던 말이고, 제목 역시 언젠가 펴낼 글쓰기 책 타이틀로 찜해둔 문장이었다. 잡지 편집부에 원고를 보낸 이메일 주소는 해킹당해 해지한 계정이고, 집주소마저 A의 집주소다.

김경욱 소설가

김경욱 소설가

이쯤 되면 단순 장난으로만 넘길 수 없는 문제. A는 자신을 사칭해 소설을 발표한 사람을 사기죄로 고소하고자 한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난관이 등장한다. 꽤 후한 액수의 원고료가 A의 계좌에 입금된 데다가, 여기저기서 이번 작품 재미있다는 평까지 들려오는 것이다.

A는 SNS를 통한 공개수배에 나선다. 그러나 익숙한 서사구조, 자주 사용하는 상투어, 늘 등장하는 인물, 몰두하는 주제의식 등 소설에 나타나는 지문(指紋)이 A의 그것이라는 반박 증거들만 쏟아진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쓴 거 맞는 것 같아요. 작가님보다 더 잘 썼거든요. 찐 가수보다 가창력이 뛰어난 히든 싱어처럼'이라는 반응까지 나온다. 이제 A는 과거 자신이 쓴 작품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쓴 적 없는 새 소설을 변호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히든 라이터? 사람들은 왜 찐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보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진짜 가수인지 아닌지에만 관심을 기울일까?"

잘써서, 혹은 못써서. 그 어떤 이유도 이 소설이 자신의 작품이 아님을 증명할 증거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A는 결국 이렇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잘났든 못났든 내 새끼 아닌 건 틀림없습니다." 이쯤에서 내가 쓴, 출산의 고통 없이 쓰인 기사를 다시 읽어본다. 사실 이것은 내가 쓴 기사가 아니고...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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