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가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
도피 운동가 숨겨주고 해직기자 지원해주기도
민주화 운동가들을 지원해 온 '시대의 어른'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이 2일 오후 5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고인은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 중앙방송(현 KBS) PD로 입사했으나, 군사 정권의 부당한 방송 제작 지시에 불만을 품고 3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이후 부친이 운영하던 광산업체인 흥국탄광을 물려받아 공격적인 경영을 펼치며 굴지의 광산업자가 됐다. 한땐 전국에서 소득세 납부 실적으로 2위에 오를 정도로 거부였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의 앞잡이가 돼야 하는 상황이 올까 우려해 1973년 잘 운영하던 흥국탄광을 정리했다. 아버지의 사업을 잠깐 거들려고 했는데, 의도치 않게 부자가 된 걸 부끄럽게 여겨왔다는 점도 사업을 접은 배경으로 작용했다. 탄광업을 정리하면서 그는 10년치 퇴직금을 광부들과 동업자들에게 나눠줬다. 채 이사장은 생전 "혼자 많은 돈을 가져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을 해왔다.
나누는 삶을 몸소 실천한 채 이사장은 독재에 저항하는 이들에겐 든든한 '뒷배'였다. 도피생활을 하는 민주화 운동가들을 숨겨주거나 셋방살이를 하는 해직 기자들에게 집을 지원해 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대의 기인', '가두의 철학자'로 불린 배경이다.
탄광사업을 정리한 그는 1974년 효암학원을 개교하고 이사장이 됐다. 채 이사장은 효암고와 개운중을 거느린 효암학원에서 줄곧 무급으로 일해 왔다.
채 이사장이 파격적 행보를 거듭한 건 1945년 8·15 해방이 안긴 충격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태어난 그는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했다. 채 이사장은 2019년 3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1945년 8월 15일 나라가 해방됐다고 온 동네가 난리인데 스스로를 황국신민이라 생각해온 나로선 '나라가 망했다는데 왜 저리 좋아하나' 의아했다"고 말했을 정도. 자신의 말과 행동하는 방식이 세뇌된 것에 불과했다는 깨달음을 얻은 그는 이후 돈과 명예,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5일 오전 9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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