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즈오 이시구로가 2017년 10월 5일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자신의 런던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017년 스웨덴 한림원은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위대한 정서적 힘을 지닌 소설들을 통해 세계와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환상에 불과한 의식의 심연을 밝혀내 왔다.” 그 후 4년 뒤인 2021년 출간된 이시구로의 새 장편소설 ‘클라라와 태양’은 이 노벨상 수여의 이유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노벨상 수상 후 최초로 쓴 장편소설로 소설의 ‘위대한 정서적 힘’을 통해 ‘세계와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3월 전 세계 30개국에서 동시 출간됐다.
소설의 화자는 인공지능 로봇, 그중에서도 ‘AF(Artificial Friend)’로 구분되는 클라라다. AI 제조기술과 유전공학이 발달한 미래에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원격 교육을 받는데, AF들은 이런 아이들의 친구로 생산돼 팔린다.
이야기는 소녀형 AF인 클라라가 매장의 쇼윈도에서 자신을 데려가 줄 아이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기다리는 데서 시작한다. 다른 AF와 달리 인간의 감정과 소통 방식에 관심이 많은 클라라의 앞에 어느 날 몹시 야위고 걸음걸이가 불편한 소녀 조시가 나타난다. 한눈에 서로에게 이끌린 둘은 함께 조시의 집으로 향한다.
첫인상과 마찬가지로 조시는 매우 아픈 소녀다. 대신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였던 옆집 소년 릭과 특별한 우정을 쌓아간다. 클라라는 조시와 릭의 우정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학습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클라라는 조시의 엄마가 자신을 데려온 이유가 단순히 조시의 친구가 되어주기만을 바라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조시의 언니도 병으로 먼저 떠나 보내야 했던 조시의 엄마는 조시마저 잃게 될까 걱정한 끝에 클라라에게 놀라운 부탁 하나를 해온다.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민음사 발행. 488쪽. 1만7,000원
상실이 두려운 인간은 헛된 희망을 꿈꾸는 대신 포기부터 한다. 그러나 가장 이성적인 존재여야 할 인공지능 로봇 클라라는 인간이 포기한 희망을 대신 품고, 기적을 위한 여정을 홀로 묵묵히 펼쳐 나간다. 소설은 클라라의 눈을 통해 인간의 미움, 질투, 화해, 용서, 사랑, 희망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특히 이때 ‘태양’은 로봇과 인간 사이에 기적의 사다리를 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다 치밀한 SF나 촘촘한 이야기를 기대한 독자라면 ‘클라라와 태양’은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애초에 작가가 움직이고 말할 수 있는 장난감이 자신을 데려 갈 어린 소녀를 기다린다는 내용의 동화로 기획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이에게 들려줬다가는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주변의 조언에 따라 동화가 아닌 성인을 대상으로 한 장편소설로 방향을 틀었다.
소설은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 소녀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사랑과 우정에 대해 질문하는 아름다운 우화이기는 하다. 다만 온통 선한 인물들의 선한 결말이 독자로 하여금 어떤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에 가닿게 하는지는 미지수다.

게티이미지뱅크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조시가 회복할 수 있도록 클라라가 태양의 힘을 빌려 염원하는 클라이막스 장면 등에서는 거장의 솜씨가 느껴진다. 익숙하지만 그렇기에 여전히 감동적인 서술로 독자의 마음을 흔든다. 무엇보다, 40여 년간 작품 활동을 해왔고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작가로서는 최고의 영예까지 누렸음에도 냉소에 빠지지 않고 여전히 희망을 꿈꾸고 말하는 작가의 진심을 느낄 수 있다. 노벨상 수상 직후 연설에서 이시구로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 내가 있습니다. 두 눈을 비비며 어제까지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이런 세계의 윤곽을 안개 속에서 더듬으려 애쓰는 60대의 남자가 말입니다. 지적으로 피로한 세대에 속하는 피로한 작가인 내가 이제 이 낯선 영역을 탐사할 에너지는 찾을 수 있을까요? (…) 나는 그 일을 해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문학이 중요하다고, 우리가 이 험난한 지대를 횡단하고 있는 만큼 특히 더 중요해지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클라라와 태양’은 작가의 이런 믿음의 첫 번째 증명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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