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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카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집이라는 족쇄를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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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카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집이라는 족쇄를 깨다

입력
2021.04.01 14:15
수정
2021.04.01 17:1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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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메이는 머리가 하얗게 세기까지 평생 일하며 살아왔다. 트럭 운전사부터 칵테일 웨이트리스, 건설업자, 바닥재 판매자, 전화 상담원, 간병인, 청소원 등등. 고등학교는 중퇴했지만 건축공학 학위도 따냈다. 혼자서 두 딸을 길렀다. 그 모든 노력에도 전기와 가스가 끊어진 집에서 예순을 맞았다. 미국 경제는 2007년부터 한동안 내리막길을 걸었고 최저임금을 받는 일자리로는 더 이상 집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녀는 마침내 집이라는 족쇄를 끊어냈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집을 처분하고 캠핑카를 사들여 거처로 꾸몄다. 휴가철이면 관리자를 구하는 캠핑장으로, 연말에는 성수기 노동자를 찾는 유통업체로 떠돌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한다. 바퀴 위에서 먹고 자고 삶을 꾸리는 유랑 노동자, 노마드가 됐다.

'노마드랜드'는 지난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도시 전체가 붕괴된 이후 여행 아닌 여행을 떠나고, 길 위에서 다른 노마드를 마주치는 주인공의 모습은 위태롭지만 희망이 공존하는 미국의 현실을 반영한다.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캡처

'노마드랜드'는 지난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도시 전체가 붕괴된 이후 여행 아닌 여행을 떠나고, 길 위에서 다른 노마드를 마주치는 주인공의 모습은 위태롭지만 희망이 공존하는 미국의 현실을 반영한다.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캡처

미국에서 노마드가 늘고 있다. 노년기에 접어든 이들이 RV(Recreational Vehicle), 승용차보다 조금 큰 주거시설이 딸린 차에서 먹고 자며 일자리를 찾아 대륙을 떠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은퇴 없는 삶을 살아간다. ‘노마드랜드’는 세상이 하라고 했던 것들을 다 했는데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 승부가 조작된 게임에서 지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용 없는 성장은 노마드를 만들어낸다. 린다가 집을 떠날 마음을 먹었던 2010년 연말, 네바다주에선 300명이 한꺼번에 집을 잃는다. 거의 최후의 기업의존형 마을 엠파이어가 문을 닫은 것이다. 마을을 소유한 기업은 장기간의 경기침체를 버티지 못했다. 1923년부터 이어온 마을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바퀴 위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을 것이다.

'노마드랜드'. 제시카 브루더 지음ㆍ서재인 옮김ㆍ엘리 발행ㆍ440쪽. 1만7,500원

'노마드랜드'. 제시카 브루더 지음ㆍ서재인 옮김ㆍ엘리 발행ㆍ440쪽. 1만7,500원

초대형 대부업체들의 파산으로 시작된 2007년 금융위기도 은퇴자를 집에서 내몰았다. 회계사였던 밥 애퍼리는 여유로운 삶을 꿈꾸며 주택에 34만달러를 투자했다. 그러나 주택시장의 거품이 터지면서 모든 자산과 저축을 날렸다. 미국의 빈약한 공적, 사적 연금체계는 그를 구할 수 없었다. 애퍼리 부부는 월 스트리트의 ‘나쁜 놈들’을 욕하면서 거리로 나섰다. “우리는 자신에게 중얼거렸죠. ‘우린 더 이상 게임 안 해’.”

기업들은 반기는 기색이다. 노마드는 싼 값에 성수기 한철만 고용하기 좋다. 세계 최대의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은 일찌감치 ‘캠퍼포스(camperforce)’라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노마드를 상대로 일자리를 홍보하고 일감이 몰리는 연말에 이들을 고용한다. 캠프장을 운영하는 한 기업은 2008년엔 은퇴자 모임을 찾아 다니며 구직자를 찾았지만 2017년에는 5만명이 50개의 일자리에 지원한다고 밝혔다. 일흔일곱 살의 노마드 데이비드는 기업들이 젊은 사람들보다 은퇴자들을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꼬박꼬박 출근해서 열심히 일할 거고, 기본적으로 노예 노동자니까요.”

아마존 홈페이지에 게재된 올해 캠퍼포스 모집 장소. 노란색은 풀타임, 푸른색은 파트타임 모집소다.

아마존 홈페이지에 게재된 올해 캠퍼포스 모집 장소. 노란색은 풀타임, 푸른색은 파트타임 모집소다.

노마드의 삶은 아름답지 않다. 창고를 하루에도 수십 킬로미터씩 뛰어다녀야 하고, 한겨울에는 캠핑카 오수관에 얼어붙은 얼음똥을 깨야 한다. 그러나 노마드들은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전환을 준비한다. 소득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노마드는 늘어난다, 노마드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그렇게 전망한다. 온라인에서 샤워장 위치부터 정부 정책의 변화까지 다양한 정보를 나눈다. 오프라인에선 대형 세미나와 파티를 개최하며 연대한다.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족쇄에서 풀려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홈리스(homeless) 대신 하우스리스(houseless)라고 부른다. 집이 없어도 보금자리는 있다. 그들 역시 꿈을 꾼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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