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리빌딩’ 이후 주전에서 벤치로 역할 변화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젠 축구가 더 즐거워요”
“프리킥골 가장 욕심” 하루 수백개씩 프리킥 연습
“마흔 넘어도 몸 허락 때까지 후회없이 축구할 것”
주연에서 물러나야 하는 때는 필연적으로 온다. 그 순간 누구는 무대를 떠나고, 누구는 조연이라는 낯선 역할에 다시 자신을 내던진다. 최근 K리그 출전 400경기를 달성한 염기훈은 후자다. 올해로 수원삼성 입단 11년차인 염기훈은 거의 매년 30경기 이상을 소화하는 주전 선수였다. 사실 프로 데뷔 이후 어디에서든 주전을 놓친 적이 없었다. 팀에서도 늘 중심이었다. 수원이 ‘염기훈팀’으로 불렸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지난해 박건하 감독이 새 사령탑으로 들어온 뒤 180도 바뀌었다. 팀은 속도 중심의 축구로 리빌딩됐고 우리 나이로 올해 서른 아홉인 염기훈에겐 선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풀타임은 단 한번도 없었고 경기 종료 몇 분을 남기고 투입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얄궂게도 그의 역할이 줄어들자 팀 성적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K리그 스타는 한 순간에 벤치선수가 됐다.
26일 경기 화성시 수원삼성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염기훈은 “마음도 편하고 어느 때보다도 축구를 즐기고 있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저도 항상 주전을 뛸 순 없고 어느 정도 물러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었어요. 세대 교체가 필요했죠.” 하지만 ‘인성 갑(甲)’으로 불리는 염기훈도 섭섭한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준비할 시간조차 없이 (역할이) 바뀌어 버렸거든요.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을 경험하다 보니 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적응이 안되고 화도 나고 서운하고, 처음에는 그랬어요.”
그를 다잡은 것은 주변 선배들의 조언이었다. 늦은 나이까지 선수생활을 했던 김남일 성남FC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해줬다. “당연한 일에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이면 팀이 안 좋아진다고 말해 주더라고요. 반대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네 역할을 찾으면 주변에서 높게 평가해 준다고요.” 장인인 김성기 감독도 그를 응원했다 “장인어른은 당신 성격이 불 같아서 홧김에 은퇴를 했는데, 그게 지금까지 후회된다고, 염 서방은 그렇게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어린 선수들이 못하는 역할과 장점이 있을 거라고요. 남일이 형도 그렇고 장인어른도 그렇고, 먼저 경험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생각을 달리하니 이젠 진짜 운동하는 자체가 즐거워요.”
축구 욕심은 여전하다. 76골 110도움을 기록하고 있는 염기훈은 4골만 추가하면 K리그 최초로 80-80을 달성한다. 그는 “요즘에는 골 욕심이 많이 나서, 경기에 나갈 때 슈팅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임한다”며 “80-80을 올해 꼭 달성하고 싶다. 경기가 많으니 뛰다 보면 찬스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가장 욕심이 나는 것은 프리킥 골이다. 그는 세트피스 41도움과 함께 프리킥 17골이라는 K리그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프리킥골은 에닝요와 공동 기록이지만, 한 골만 더 넣으면 단독 선두가 된다. 개인 훈련도 프리킥에 집중한다. 축구공 10개를 가지고 나가 하루 1시간 30분씩 수 백 개의 프리킥 슛을 찬다. “제가 우스개 소리로, ‘형이 들어가기 전에는 너네가 프리킥 차는 데, 형이 들어가면 너네가 알아서 양보해야 한다’고 했어요. ‘한 골만 들어가면 신기록이다. 한 골 넣은 뒤엔 너네들에게 양보할 테니까, 그 전까지는 다 나오라’고요.”
하지만 개인 기록보다도 염기훈이 원하는 건 리그 우승이다. 도움왕을 비롯해 FA컵 우승, MVP 등 경력이 화려하지만, 리그 우승은 아직 해보지 못했다. 그는 ‘개인 기록과 우승 중 하나만 선택한다면’이라는 짓궂은 질문에 “우승”이라고 바로 답했다. “지금도 정말 많은 기록을 세웠다고 생각해요. 개인 기록은 지금도 충분해요. 그보다는 우승컵을 들고 싶어요.” 분위기는 좋다. 어느 때 보다 리그 초반 성적이 우수하고 젊은 선수들의 활약도 대단하다. “(이)동국이형 우승하면서 은퇴할 때 너무 부러웠어요. 제 로망도 우승하면서 은퇴하는 거에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염기훈은 단서를 달았다. “아, 그렇다고 올해 우승하면 은퇴하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저는 마흔이 넘어도 정말 ‘내가 이제 못하겠다’ 싶을 때까지 할 거에요. 꼭 최고의 순간에 은퇴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래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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