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한국어 교가 울려 퍼진 고시엔서 역전승까지 "가슴이 벅차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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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한국어 교가 울려 퍼진 고시엔서 역전승까지 "가슴이 벅차 올라"

입력
2021.03.24 19:00
수정
2021.03.24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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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국제고, 사상 첫 고시엔 진출

24일 일본 효고현 한신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제93회 일본 선발고교야구대회(봄 고시엔) 첫 시합 32강전에서 교토국제고가 10회전 연장 승부 끝에 시바타고를 5-4로 이긴 뒤 한국어 교가를 듣고 있다. 이 학교 교가는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아침저녁 몸과 덕 닦는 우리의 정다운 보금자리 한국의 학원'이라는 내용이다. 효고=교도 연합뉴스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토(大和)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아침 저녁 몸과 덕 닦는, 우리의 정다운 보금자리 한국의 학원...."

24일 낮 12시쯤, 일본 고교야구의 '성지(聖地)' 효고현 한신(阪神) 고시엔(甲子園) 구장에 교토국제고 교가(校歌)가 울려 퍼졌다. NHK방송 전국 생중계를 통해 한국말 노래가 열도에 전파됐다. 이 노랫말은 차별과 싸워온 재일동포 학생들이 어려움을 이겨내며 부르던 '아리랑'과 같은 정신적 힘이 돼왔다. 이제 이 한국계 민족학교의 후손인 일본인 학생과 900여 명의 재일동포 응원단이 힘차게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에서 야구는 특별한 스포츠고, 고시엔은 ‘청춘’의 상징입니다. 바로 이 꿈의 무대에서 우리말 교가가 두 번이나 울려 퍼지다니요.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재일동포 3세 지영이(54)씨는 이날 열린 제93회 선발고교야구대회(봄 고시엔) 교토국제고와 시바타고 경기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는 25년 전인 1986년, 당시 ‘교토한국고’일 때 졸업생이다.

외국계 학교가 이 대회에 진출한 것은 사상 처음이다. 이날 승리하면서 경기 후 또 한 번 교가가 불렸다. 1947년 ‘교토조선중’으로 개교, 1999년 야구부를 창설한 교토국제고는 학생 수 131명에 운동장 길이도 56m인 작은 학교다.

2012년 졸업생인 재일동포 3세 허유노(25)씨는 “모교가 고시엔에 진출해 너무 자랑스럽다”면서도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져 좋지만 일본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NHK는 교가가 방송될 때 일본어 해석 자막을 ‘동해’ 대신 ‘동쪽의 바다(東の海)’로 내보냈고, “일본어 번역은 학교 측이 제출했다”는 설명을 달아 논란이 됐다. 박경수 교장은 “학교 측은 음원 CD만 제공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앞서 지난 2월 교도통신은 이런 번역을 일본고교야구연맹이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3월 24일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한신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교토국제고와 시바타고의 경기가 시작하기 전, 응원 온 재일동포들이 태극기와 응원 깃발을 들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맨 오른쪽이 인터뷰에 응한 재일동포 3세 지영이씨. 이날 교토 소재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가 5대4로 승리했다. 효고현 니시노미야=최진주 특파원


경기 내용 면에서도 흥미진진했다. 6회말 3-3이 된 뒤 9회까지 팽팽하던 경기는 연장 10회초 나카가와 하야토와 쓰지이 진 선수가 연달아 안타를 날려 1점씩 획득하면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5-4 역전승이다. 박경수 교장은 “운동장이 좁아 다른 구장을 빌려 외야 연습을 할 만큼 열악한 조건에서 고시엔에 첫 진출에 첫승까지 거둬 두 배로 기쁘다”고 상기됐다. 그는 “일본인 학생선수들도 일본 언론과 인터뷰에서 교가를 힘차게 부르겠다고 말해줘 참으로 기특했다”고 덧붙였다.

교토국제고는 한국계 학교지만 한일 학생이 섞여 있다. 야구부원들도 야구를 좋아해 이 학교에 들어 온 학생들이 많아 대부분 일본 국적이다. 하지만 한국어 교가를 부르는 데 별 거부감이 없다. 이날 적시타를 때린 쓰지이 진 선수의 누나 쓰지이 유우씨는 “보육원(유치원) 때부터 야구를 했던 동생은 야구를 하고 싶어 이 고교로 들어왔다”며 “고시엔 진출의 꿈이 이뤄져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24일 일본 효고현 한신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제93회 일본 선발고교야구대회(봄 고시엔) 첫 시합 32강전에서 교토국제고 선수들이 역전에 성공한 뒤 환호하고 있다. 교토국제고는 이날 시바타고에 먼저 2점을 내주고 0-2로 끌려가다 7회초 1사 만루 상황에서 1번 타자 다케다 유토의 싹쓸이 3점 적시 3루타로 3-2 역전에 성공했다. 교토국제고가 10회전 연장 승부 끝에 5-4로 이기고 첫 승리를 거두며 16강전에 진출했다. 효고=교도 연합뉴스

이 학교에 야구부가 생긴 것은 1999년 4월. 학생 수 감소에 따른 ‘학교 살리기’ 대책의 일환이었다. 1997년 당시 이사장이었던 왕청일씨는 "내가 이사회에서 야구부 창설을 제안한 주인공"이라며 "120명이던 학생 수가 72명까지 줄어 학교가 없어질 것 같아 아이디어를 냈다"고 설명했다. 첫 연습경기에서 58대0으로 진 약체였지만 고마키 노리쓰구(38) 감독이 2008년 부임한 뒤 차근차근 실력을 키웠다. 2018년 교토부 고교대회 준우승에 이어, 지난해 오사카와 교토부를 포함한 긴키(近畿)지역 고교대회 4강에 올라 이날 고시엔 그라운드를 밟게 됐다.

이날 승리의 영광은 많은 사람의 염원이 모여 이뤄졌다. 교토국제고의 출전 비용을 마련하고 응원하기 위해 재일동포들이 각지에서 기금을 모았다. 한일의원연맹(대표 김진표 의원)도 후원금을 모아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서울사무소에 기탁했다. 교토, 오사카, 도쿄 등에서 온 재일동포 900여 명은 이른 아침 교토역에 모여 20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경기장에 도착했다. 오사카 소재 한국계 학교인 건국고교 홍윤남 교감은 “우리 민족학교에서 고시엔에 진출하고 우리말 교가가 방송되다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고 기뻐했다.


효고현 니시노미야= 최진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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