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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호소 정권

입력
2021.03.24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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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하다'라고 풀이한다. 콩쥐의 억울한 물 긷기, 개구리 왕자의 억울한 저주는 문학에 나오고, 강기훈의 억울한 옥살이, 김용균의 억울한 죽음은 현실에 있다.

비교하고 질투하는 현대인의 자학적 습성은 '억울하다'의 정의를 조금 바꿨다. '내가 보기에 상벌이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아서 분하고 답답하다.' 보상은 공연히 더 받고 처벌은 미심쩍게 덜 받는 타인을 볼 때, 우리는 억울하다. 이를테면, 옆 동네 아파트 값이 2억 원 더 올랐을 때, 음주단속 경찰이 앞 차만 그냥 보내줬을 때.

문재인 정권은 새로운 말뜻을 추가했다. '내가 아주 잘못하지 않은 건 아닌데 세상이 나만 갖고 그래서 분하고 답답하다.' 영화 '변호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기한 송강호는 힘없는 사람들의 억울함에 분노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힘있는 현 정부 사람들은 제 억울함을 주로 호소한다. "감히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문재인 대통령은 사저 부지로 지난해 경남 양산시 농지를 샀다. '농지는 농사짓는 사람에게 돌아가게 하라'는 게 농지법의 당연한 취지다. 그래서 농지엔 집을 지을 수 없고, 농지 매입자는 농사를 짓겠다는 약속을 영농계획서에 새긴다. 문 대통령도 영농계획서를 써냈다. 그리고 9개월 만에 집 지어도 되는 땅, 대지로 지목을 바꿨다.

대통령이어서 누린 특혜도 아니고 농지법이 느슨해 불법도 아니라지만, '헌법을 수호하는 국가 원수'로서 대단히 당당한 일도 아니다. 그 떳떳하지 못함을 꼬집은 사람들에게 문 대통령은 "선거 시기라 이해하지만 민망하고 좀스럽다"고 성을 냈다. '지나친 정치 공격에 시달리다 격분한 피해자'를 자처하는 것으로 정적들의 입을 막았다. 대통령의 어휘 선택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피해자 되기'는 문재인 정부 사람들의 정서적 코드다. "검찰과 언론이 박형준엔 눈감고 나만 못살게 군다, LH 땅 투기를 막을 이해충돌방지법은 야당이 뭉그적거려서 못 만들었다, 부동산 투기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싹을 틔웠다, 여성들이 김학의는 놔두고 박원순 성추행만 물고 늘어진다, 영남 기득 보수에 비하면 우리는 누린 것도 없다…" 개구리 왕자를 닮은 울음이 권력이 넘치는 곳마다 수시로 울려 퍼진다. "억울억울, 어굴어굴."

권력자인 그들의 억울함은 패권적이라는 점에서 약자들의 억울함과 다르다. 그들에겐 억울하다고 큰 소리로 또박또박 떠들 발언권이 있다. 데시벨 높은 그들의 호소는 힘없어 겨우 새 나오는 신음을 가린다. 너무나 억울해 차마 말이 되지 못한 절규에 귀 기울이지 못하게 한다.

가진 자인 그들의 억울함은 또한 배타적이다. 스스로를 피해자라 부르면서도 '우리 사람'이 아닌 피해자들의 울분에 좀처럼 감응하지 않는다. 끼리끼리 분노하고 위로하느라 바쁘다. 그들이 연대를 알았다면, 못 가진 사람들이 요즘처럼 속절없이 생을 포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을 바꾸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문 대통령은 약속했는데, '억울한 사람의 자리를 바꾼 대한민국'이 되고 말았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어떤 말들은 줄어들 필요가 있었다. 억울하지 않은데 억울해하는 말 같은 것들은." 깊은 마음으로부터, 힘 센 그들에게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어주고 싶다.



최문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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