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論’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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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論’에 대하여

입력
2021.03.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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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이준희한국일보 고문


부동산 적폐론, 책임 회피 면탈 의심
집권 말 적폐 운운은 무능 자인 행위
LH 사태만이라도 책임지고 처리해야

여기에다가도 ‘적폐’를 갖다 붙일 건 아니었다. 4년 내내 입에 달고 살아 습관이 됐다 해도. 부동산 적폐가 아니라 그냥 ‘LH 사태’나 ‘신도시 투기 사태’로 부르면 될 일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사안을 정쟁의 도구로 삼지 말라”고 했으나 적폐로 호명한 순간, 이 사안은 엄정한 형사사건에서 해결 난망한 정치사건으로 변질됐다.

LH 사태는 악성 죄질에 비해 사건의 얼개는 단순하다. 그들만의 정보를 이용해 일반인은 평생 엄두도 못 낼 부당수익을 도모한 행위다. 이 정부 들어 집 한 칸의 꿈마저 잃은 이들에게 절망적 박탈감을 안겨준 사건이다. LH 직원서부터 국토부, 지자체 관계자들까지 수사 범위는 방대해도 30년 전 6개월 이상 기간에 1만 명 안팎씩 적발하고 1,000명 이상을 구속기소한 1, 2차 신도시 투기 수사를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다.

정작 문제는 대통령과 정권이 사건을 보는 인식이다. 적폐는 박근혜 정부 때부터 부쩍 익숙해진 용어다. 주로 역사·문화 분야의 좌파적 경향에 무리하게 그 올가미를 씌웠다.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같은 것이 그 부정적 산물이다. 반(反)보수 정도의 이념성 라벨이 현 정부에선 정권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사안에 붙여지는 정파성 낙인으로 범용화했다.

말 그대로 긴 세월 쌓인 폐단이니 일단 적폐로 규정하면 기막힌 마법이 작동된다. 어떤 잘못이든 현 집권세력(만)의 책임은 아닌 게 된다. 패악을 쌓아온 과거로 책임이 전가되고, 이를 방치해온 이전 정권은 공존 불가의 적대세력이 된다. 청산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하게 돼도 상관없다. 고질적인 사회구조적 문제 탓으로 돌리면 된다. 책임 회피 및 면탈이 적폐 용어의 본질이다.

이번 사안의 전개 양상 역시 이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대단한 일관성이다. 25차례 부동산 대책에도 불구, 집값을 역대 최고치로 올려놓고도 매번 이명박 박근혜 탓을 하더니 이번에도 박근혜 정부 초기, 심지어 10년 전 이명박 뉴타운 건부터 훑어보겠단다. 차제에 악순환의 고리를 제대로 자르겠다는 진정성보다는 정파 간 이전투구로 몰고 가 책임을 뭉개겠다는 얄팍한 저의가 두드러진다.

과거로 책임을 돌리는 습성은 당장의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더 나은 미래를 믿고 선출해준 이들의 기대에도 반하는 일이다. 심지어 한 진보 매체에선 LH가 해방 직후 적산처분을 담당했던 친일파의 후신이므로 부동산 적폐의 뿌리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라는 논리까지 봤다. 이런 식이라면 토지 수탈이 기승하던 조선왕조에는 왜 책임을 묻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번에 문제 된 3기 신도시 조성 계획이 나온 게 이 정부 출범하고도 한참 지나서다. 심상정 의원 말마따나 이번 건은 누가 뭐래도 “문재인 정부의 적폐”다.

나아가 적폐는 책임 소재 자체가 불분명해서 아무데나 떠넘겨도 된다. 전 법무장관은 '부동산시장 부패는 지난해 지시를 이행치 않은 (윤석열)검찰 책임'이라 했고, 사려 깊다던 차기 대선주자도 장단을 맞췄다. 당시 대상은 기획부동산 등이었지 정보 독점한 공적 집단의 투기 행위와는 성격이 달랐다. 이 정도면 책임 전가는 거의 이 정권의 체질이다.

더 길게 얘기할 것도 없다. 집권 초도 아닌 말기에도 매사 적폐 운운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능과 무책임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에 다름 아니다. 옛말에 염치를 아는 것이 치국의 근본이라고 했던가. 제발 이번 LH 사태만이라도 제대로 처리해 언필칭 ‘촛불정권’의 존재 이유를 마지막에라도 보여주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적폐’를 더는 입에 담지 말라.







이준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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