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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진 현대사... 한국과 같고도 다른 미얀마

입력
2021.03.15 20:0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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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국제 현안과 외교안보 이슈를 조명합니다. 옮겨 적기보다는 관점을 가지고 바라본 세계를 전합니다.

14일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촛불집회가 열려 한 시위 참가자가 군중 앞에서 주먹을 들고 있다. AP=뉴시스

14일 미얀마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촛불집회가 열려 한 시위 참가자가 군중 앞에서 주먹을 들고 있다. AP=뉴시스


미얀마의 현대사는 한국과 같고도 다르다. 두 나라는 유사한 정치적 격변을 겪었지만 선택은 늘 정반대였다.

5·16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미얀마에서도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네윈 장군은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걸고 고립과 자력갱생의 길로 갔다. 자원이 없는 한국이 개방경제를 선택한 것과는 다른 길이었다. 민주화 운동 역시 유사한 궤적을 밟았다. ‘6월 민주항쟁’ 이듬해인 1988년 미얀마에도 민주화 시위 속에 ‘양곤의 봄’이 찾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민주화는 6개월 만에 군부의 쿠데타에 막혀 버렸다.

한국이 제도적 민주화를 성취할 때 미얀마에선 민주화의 상징 아웅산 수치가 연금되고 다시 군정이 실시됐다. 이런 상황은 미국의 압박과 지원 속에 2011년 군이 권력을 명목상 민간정부로 이양할 때까지 계속됐다.

미얀마의 상황이 더 암울한 것은 이번 쿠데타가 10년째 계속된 점진적 민주화 이행 중에 발생한 점이다. 앞서 군부와 민간 정부는 완전하진 않지만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권력을 분점했다. 군부는 헌법 규정으로 최소 의회 지분 4분의 1, 3개의 주요 장관직을 보장받았다. 헌법 개정 권한과, 언제든 권력에 복귀하는 것까지 허용됐다. 50년이란 뿌리깊은 군부 통치를 제한적이나마 민주주의 제도로 끌어들여 민간 정부와 경쟁을 유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쿠데타로 군의 정치참여는 실패로 끝났다.

앞서 군부와의 불편한 동거 속에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의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은 작년 11월 총선에서 83%를 차지했다. 군부로선 이 같은 NLD의 대중 인기, 헌법개정 움직임 등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국 지난 총선의 부정행위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아웅산 수치를 비롯한 400여 명을 구금하고 권력을 민 아웅 흘라잉 최고 사령관에게 이양했다. 10년 전 군부가 선물처럼 던져준 민주주의는 거짓 새벽이었던 셈이다.

국제사회가 미얀마에 대한 제재 강도를 높이고 있지만 1988년 전례를 보면 당분간 군부의 길을 막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미얀마의 구조적 불평등, 빈곤과 인종갈등, 코로나19로 인한 경제문제는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개도국에서 군부의 후퇴는 민주세력 전진과 맞물려 있다고 본다면, 한국 군부세력의 쇠퇴는 매우 상징적이다. 한국에서 경계 실패로 장군들이 징계를 받는 것보다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보여주는 장면도 없을 것 같다. 이처럼 당연해 보이는 군에 대한 문민통제는 민주화의 산물이고, 보다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은 것은 YS정부의 하나회 해체란 평가가 많다.

이와 관련, 미국 MIT대 대런 에스모글루 교수는 책 ‘좁은 회랑'에서 “군사정권이 폭력적으로 학생 시위자와 노동조합들을 탄압하면서 국내외에서 지지를 잃은 것이 민주적 체제로의 이행에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런 이행 과정이 전반적으로 촉진된 것은 농업이나 자연자원에 의존하는 경제보다는, 산업화하는 경제에서 그와 같은 억압이 훨씬 더 파괴적이고 희생이 크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태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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