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기관 요청에 따른 마약 매매는 무죄”

게티이미지뱅크
“제보 진술만 가지고는 명확히 조사할 수 없으니 가능하면 사진 등의 증거자료를 확보해서 전송해 주세요.”(마약수사 담당 경찰관)
“증거자료로 약물을 가져다드리면 되는 건가요? 오늘 그쪽에 잠입해 가능하면 약물을 구입해보도록 해보겠습니다. (마약 일당의) 신뢰를 얻어 보겠습니다.”(제보자 A씨)
카자흐스탄 국적의 고려인 A씨는 2018년 10월,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에서 외국인들이 마약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찰에 제보했다. 며칠 뒤 담당 경찰이 ‘증거를 확보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말을 통역사에게 전해 들은 A씨는 “직접 약을 구매해서 증거를 확보해보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그는 카자흐스탄에서도 사촌동생이 마약중독으로 사망하면서 현지 경찰의 마약정보원으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10월 19일 통역사에게 ‘마약잠입구매’ 계획을 알린 A씨는 오전 11시쯤 마약거래 일당과 접촉해 현금 5만원을 주고 합성대마에 속하는 ‘스파이스’를 건네받았다. 받은 스파이스 사진을 곧바로 촬영해 경찰에게 전송했고, 마약은 화장실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 폐기했다. 11월엔 직접 경찰서에 나가 경험한 스파이스 매매 실태를 소상히 진술했고, 이를 통해 경찰은 마약사범 일당 8명을 구속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A씨는 이후 당황스러운 처지가 됐다. 마약사범 검거에 일조했다는 뿌듯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제보 목적으로 나섰던 마약구매 때문에 마약사범 취급을 받으면서 재판에 넘겨진 것. A씨 측은 “수사기관에 증거로 제출하기 위한 것으로 고의가 없었다”며 항변했지만 1심 법원인 인천지법은 “설령 증거수집의 목적으로 마약을 매매한 것이라도 수사기관의 지시나 위임을 받지 않고 매매를 한 이상 범행 의도가 없었다고 할 수 없다”며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A씨는 억울함에 고개를 떨궈야 했다.
다행히 항소심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 윤강열)는 “수사기관의 요청에 따라 증거확보 목적으로 마약을 매매한 것은 무죄”라고 12일 밝혔다. 재판부는 "A씨는 통역사를 통해 마약류 거래 증거자료 확보를 요청받았을 뿐 아니라, 스파이스 매수 직전 마약류 매수 예정 사실을 통역사에게 보고하기까지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재판부는 "A씨 자신이 투약하는 등 개인 목적으로 스파이스를 매수한 것이라면 매수예정 사실을 보고하거나, 매수 직후 촬영한 다음 경찰에 전송할 아무런 합리적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A씨의 소변과 모발 등에서 마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은 점도 무죄 선고의 이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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