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든 길이 새로운 길을 만든다

이전기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잘못 든 길이 새로운 길을 만든다

입력
2021.03.11 20:00
0 0
장동선
장동선뇌과학 박사

편집자주

그 어느 때보다 몸의 건강과 마음의 힐링이 중요해진 지금, 모두가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한, 넓은 의미의 치유를 도울 수 있는 이야기들을 자연과 과학, 기술 안에서 찾고자 합니다.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 The Winding Road. 출처: Wikimedia Commons


강연호 시인의 시 '비단길 2'는 "잘못 든 길이 나를 빛나게 했었다"로 시작해서 "어렵고 아득해질 때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마저 가야할 어떤 약속이 지친 일생을 부둥켜 안으리라 생각했었다"라고 이어진다. 시의 중간에는 "길이 막히면 길을 버리라고 어차피 잘못 든 길 아니더냐고 혀를 빼무는 세상의 현자들"도 언급되지만 마지막에는 이렇게 끝맺는다. "갈 데까지 가보려거든 잠시 눈물로 마음 덥혀도 누가 흉보지 않을 것이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노벨위원회의 2014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소개 자료. 위는 장소세포·격자세포, 아래는 뇌.


우리의 뇌 안을 들여다본다면 잘못 든 길이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것이다. 뇌 안에는 우리가 새로운 위치로 이동할 때마다 공간의 정보를 업데이트해서 기억하는 '장소 세포(Place cell)'가 존재한다. 한 번 와봤던 곳에 다시 가면 그 장소의 기억이 남는 것이다. 뇌 안에는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동한 거리와 방향을 알려주는 '격자 세포(Grid cell)'도 존재한다. 이 세포들은 일정 간격으로 나뉜 특정 지점들을 지날 때마다 내가 얼마만큼 움직였는지에 대한 정보를 준다. 우리가 모르는 길을 찾아가는 동안 뇌 안에서는 실제로 매순간 지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뇌 안에 만들어지는 지도와 장소세포, 격자세포에 대해 밝혀낸 연구자들은 이 업적으로 2014년도에 생의학 분야의 노벨상을 수상했다. 잘못 든 길이 없다면 새로 만들어지는 지도도 없다.

뇌 안의 장소 세포에 대해 밝혀낸 존 오키프(John O’Keefe) 교수를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 같은 해 여름에 만났었다. 그는 내가 있었던 연구소를 방문해서 강연을 했고, 강연 후 함께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박사과정 2년차 학생이었고, 앞으로 어떤 주제로 연구를 하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진로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다. 그런 나와 다른 학생들에게 강연이 끝나고 나서 존 오키프 교수는 자신이 걸어온 삶의 길에 관해서도 굉장히 인상 깊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왼쪽부터 존 오키프(John O’Keefe), 에드바르 & 마이브리트 모제르 부부(Edvard & May-Britt Moser). 노벨위원회의 2014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소개 자료.


"살면서 어떠한 길을 가야 할지 처음부터 알 수 있을까요? 모릅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성적이 좋지 않아서 대학교에도 바로 진학하지 않았어요. 보험회사에서 일하기도 하고, 비행기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지요. 대학교에 진학하기로 한 건 나중이었고, 처음에는 일하면서 야간수업을 들었어요. 내가 정말 관심이 있는 분야를 찾는 데까지는 꽤 오래 걸렸지요. 하지만 어떤 길이 나의 길인지는 꾸준히 가봐야 압니다."

"내가 든 길이 잘못 든 길이 아닌지 의심이 든 적은 없었나요?" 내가 물었었다. 다른 학생들도 궁금해하던 이 질문에 그는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

"왜 없었겠어요. 내가 뇌 안의 장소 세포를 처음 발견한 것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죠? 40년도 넘었답니다. 처음에는 이 연구가 중요하다고 알아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어요.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꾸준히 나의 길을 갔어요. 참을성과 인내심을 가지고. 길이 없다고 잘못 든 길이라 생각하면 길은 생기지 않아요.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겁니다. 새로운 장소를 가봐야 뇌 안에 그 장소의 지도가 생기는 것처럼."

모든 길은 처음에 잘못 든 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 길을 가다가 막히면 그 길을 버리고 돌아오고, 누군가는 수풀을 헤치며 그 길을 계속 걷는다. 선택의 문제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길을 걷지 않는다면 내 안에 지도는 생기지 않는다. 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도. 남이 만들어 놓은 지도를 따라 걷겠는가, 아니면 나만의 지도를 그려보겠는가.

장동선 뇌과학 박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장동선의 치유하는 과학
한국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네이버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스탠드에서 구독하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