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이 흘렀지만, 그곳은 여전히 ‘죽음의 땅’이다. 주변 지역은 아직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못한다. 폭발 사고로 지붕이 무너진 원자로 4기를 봉인하기 위해 거대한 콘크리트를 덮어놨지만, 그 속엔 인류를 또 한번 재앙에 빠트릴 방사능 물질들이 활화산처럼 꿈틀대고 있다. 노후화한 석관(石棺)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전 핵 사고’란 타이틀을 보유한 체르노빌은 역사 교과서에 박제된 대재앙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시한폭탄이다.
책 '그날 밤 체르노빌'은 1986년 4월 26일 참사가 터지기 이전으로 시곗바늘을 되돌려 놓는다. 2019년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미국 HBO드라마 ‘체르노빌’의 활자 버전으로 볼 수 있는데 분초 단위로 기술한 생생한 묘사, 실존 인물들의 증언이 더해진 덕분에 울림이 더 크다.
힘은 역시 팩트에서 나온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기밀이 해제된 공산당 정치국 회의록, 생존자들의 회고록, 일기, 과학자들의 조사보고서, 연구논문, 사고 직후 방사능 정찰부대가 사용했던 지도, 소방서의 화재 출동 기록까지 샅샅이 뒤져 재구성했다. 취재에만 10년 넘는 공을 들였다.
체르노빌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는 이미 익숙한 주제다. 이 책의 미덕은 왜 최악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전말을 촘촘하게 추적해나가는 데 있다. 소련 당국이 공식 발표한 체르노빌 사고의 원인은 인간의 실수, 우연이 겹친 악재쯤으로 요약된다.
‘하필이면’ 보통은 낮에 실시하던 터빈 테스트(외부 전력이 차단됐을 때 전력 공급 가능 범위 체크)가 밤으로 미뤄지면서 시스템이 불안정해졌고 ‘하필이면’ 업무에 능숙한 직원이 교대 근무로 자리를 비웠고 ‘하필이면’ 자기 믿음이 매우 강한 관리자가 테스트를 강행하면서 ‘하필이면’ 초보 운전원이 모드 설정을 오작동시키는 실수를 저지른 끝에 사고가 터졌다는 거다. 하지만 책은 체르노빌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고였다고 반박한다.
그 당시 소련에게 원전은 소비에트 유토피아를 실현해줄 마지막 구원이었다. 미국이 우주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치고 나가자, 소련은 원자력에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목표만 원대했을 뿐, 현실은 미약했다. 이미 소련은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침체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막대한 군비 지출과 관료들의 만성적 부패로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은 뒷걸음질 쳤고, 체르노빌 원전 건설 현장에서도 핵심 장비와 부품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인력도 부실했다. 원전 전문가, 기술자 대신 공산당에 충성하는 이들로만 자리가 채워졌다. 망해가는 조직의 요소를 몽땅 갖춘 것이다.
경고음은 여러 차례 울렸지만 외면당했다. 소련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는 체르노빌이 처음이 아녔다. 1957년 마야크 폭발사고 등 수십 건이 발생했지만, 단 한 건도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소련의 치부를 드러내선 안 된다는 권력의 환상이 진실을 가렸다. 과학자들의 무책임도 극에 달했다. 그들은 만일의 사고에 대비한 계획조차 수립하지 않았다. 사고가 터지면 만성적 비밀주의와 임시방편으로 수습하면 그만이었다. “우리 조국의 원자로는 너무 안전하다”는 맹목적 낙관론만 늘어놓으며 권력에 장단을 맞췄다.
한마디로 사고가 나지 않는 게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체르노빌은 오만한 권력의 무능, 무지, 무책임, 무모함이 거짓과 은폐와 뒤엉켜 터진 필연의 참사였다. 문제는 사고 이후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거다. 방사성 물질이 유럽 하늘까지 퍼져나가는 동안 소련 당국은 “전 세계에 망신당할 수 없다”며 침묵하고, 쉬쉬했다. “즉각적인 해로움은 없다”는 자기 기만에 가까운 주문을 외우며 사태를 해결하기보다 통제하는 데 애를 썼다.
소식이 새어 나갈까 주변 지역 도로를 통제하고 전화를 끊는 것도 모자라 동요하는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메이데이 퍼레이드를 강행한 대목에선 헛웃음이 나온다. 언론 역시 대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소방대원 등 영웅들의 용맹한 희생 서사만 부각시키며 소련 당국의 책임론을 물타기한다.
상황이 악화되자 권력자와 과학자들은 네 탓 공방에만 열을 올렸다. 사건 발생 19일 만인 86년 5월 14일 소련이 사태를 공식 인정하는 자리에서도, 고르바초프는 서구를 향해 소련을 음해하려는 사악한 선동을 멈추라고 비판했다. 그는 2006년에서야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하는 데 진정한 원인은 체르노빌 재앙”이었다며 실수를 인정한다.
사고에 우연이란 없다. 한 사회의 부패, 적폐, 악습, 구태가 임계점을 넘을 때 참사가 발생한다는 걸 체르노빌은 말해주고 있다. 원전의 경제성과 위험성을 둘러싼 논란보다 어쩌면 우리에게 더 중요한 교훈일지 모른다. 제2의 체르노빌은 언제 어디서든 또 일어날 수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