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평균 10명 여성혐오 범죄로 사망
당초 기대 모았던 오브라도르 대통령
여성들 시위 '우파의 음모' 색깔론 치부
중남미 여성들의 삶은 힘겹다. 9일(현지시간) 공개된 세계보건기구(WHO) 보고서를 보면 2000~2018년 남미 여성의 25%가 폭행과 성폭행을 경험했다는 통계도 있다. 여성의 사회활동 자체가 허락되지 않은 중동지역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치다. 그 중에서도 멕시코 여성들의 피해가 특히 크다. 이 나라에선 하루에 여성 10명이 ‘페미사이드(femicideㆍ여성혐오 살해)’ 범죄로 숨진다. 그런데 이들을 더욱 분노케 하는 이가 있다. 바로 대통령이다.
5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의 대통령궁은 철제 바리케이드로 둘러싸여 있었다. ‘평화의 벽’이란 그럴싸한 이름도 붙여졌다. 하지만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예정된 여성계 시위를 막으려 방어벽을 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여성들은 굴하지 않았다. 멕시코 여성들은 바리케이드 전체를 페미사이드 피해자들의 이름으로 덮고, 철조망 틈 사이에 추모의 의미로 꽃을 꽂았다. 여성의 날 당일에는 벽을 무너뜨리려다 일부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기도 했다. 최루탄과 진압봉이 등장할 만큼 시위는 격렬했다.
양측의 관계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2018년 취임한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89년 만에 탄생한 좌파 지도자였다. 당연히 여성계의 기대도 컸다. 기대가 실망, 다시 분노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멕시코 작가 데니스 드레서는 방어벽이 설치된 날 “오브라도르 정권은 역사상 가장 여성친화적인 정부를 자처하고도 대통령궁을 벙커로 만들어 놨다”고 맹비난했다.
갈등이 싹튼 건 지난해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여성계의 비판을 ‘색깔론’으로 몰고 가면서다. 그 해 페미사이드 이슈가 사회문제로 비화하자 멕시코시티 여성의 날 시위에는 역대 최다인 3만명이 모여 정부를 성토했고, 급기야 여성 총파업으로까지 이어졌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이를 뜬금없이 ‘우파의 음모’로 규정하고, “파업 배후에 우파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올해 시위를 향해서도 “나를 공격하려는 보수 세력의 음모”라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여기에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성폭행 의혹을 받는 주지사 후보를 옹호한 것도 성난 민심을 부채질했다. 6월 열릴 멕시코 남부 게레로주(州) 지사 선거에서 여당 후보로 출마한 펠릭스 살가도의 성폭행 피소 사실이 공개됐지만, 그는 외려 측근을 비호하며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살가도와 자신을 동일시 하고 있다”면서 양측의 타협이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