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운동장 폐쇄되자 주차장서 체력단련
6년 노력 끝에 ‘금녀의 벽’ 깨고 K리그2 복귀
어느덧 22년차 국내 국제심판 중 최고참
“2023 월드컵도 욕심”…5회 연속 월드컵 도전
“은퇴나 그 이후의 삶은 아직 생각해본 적 없어요. 몸이 안 따라주고 정말 무슨 수를 써도 ‘체력이 여기까지구나’ 싶으면 바로 그만둬야 해요. 경기에 피해를 주면 안 되잖아요. 하지만 그 전까진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할 거예요.”
‘K리그 유일의 여성심판’ 김경민(41)씨가 다시 K리그에 복귀했다. 방출된 지 6년 만이다. 당시에도 홍일점이었지만 지금도 홍일점이다. 국내에서 가장 강도 높은 체력 테스트와 엄밀한 기준으로 선발되는 K리그 심판의 벽은 여성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6년 동안 아무도 그 벽을 넘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생긴 이 ‘금녀의 벽’을 다시 허문 것은 다름 아닌 김씨다.
세계여성의날인 8일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난 김씨에겐 어린아이 같은 열정이 엿보였다. 잘할 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다가, 한번 잘못하면 온갖 악역을 떠맡게 되는 게 심판이다. 단 한번의 실수도 전파를 타고 안방까지 중계된다.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심판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직업인지’ 설명하는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2015년 K리그 심판에서 빠지게 됐을 때도 김씨의 선택지엔 심판을 그만둔다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완벽한 경기를 하지 못한 아쉬움뿐이었다. “방출되면서 고난의 시대가 시작됐죠. ‘내가 못해서 떨어진 거다’ 이런 자책감이 너무 많이 들었고, 이제 더 이상 남자 경기에 들어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힘들었어요. 그래서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저를 좀더 조였던 것 같아요. 더 심하게 운동하고, 경기 하나에 더 몰입했어요. 게임이 끝나면 새벽 4시까지 계속 돌려봤고, 실수를 찾으면 잠을 자지 못했죠. 이번에 다시 K리그에 돌아오게 됐을 때에야 ‘아, 내가 정말 열심히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씨에게 처음 심판이라는 직업을 권유한 사람은 한국여자축구연맹 부회장을 지낸 고 최추경 감독이다. 당시 울산과학대 축구부 감독이었던 최 감독은 고질적인 정강이 부상으로 힘들어하던 대학 선수 김씨에게 “성격이나 체격 조건이 딱 심판이다”며 심판 일을 권했다. 하나에 꽂히면 그것밖에 모르고, 부상을 숨기고 합숙생활을 고집하는 융통성 없는 그의 성격이 심판과 들어맞는다고 여긴 것이다.
최 감독의 말처럼 김씨는 2000년 심판 자격증을 딴 뒤 순식간에 심판 일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완벽에 집착하는 성격 탓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들키지 않은 실수라도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면 밤잠을 설쳤다. “주변에서 ‘심판도 사람이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 말씀을 하시곤 해요. 하지만 저는 동감하지 못하겠어요. 심판의 실수에는 피해가 명확해요. 피 흘리면서 밥 먹고 운동만 하는 선수들이 있고, 팬이 있고, 팀이 있는데. 심판은 완벽해야만 해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도 그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체육시설이 폐쇄되자 강릉 자택 아파트 주차장과 인근 아이스아레나 주차장에서 운동을 했다. 김씨는 스프린트를 하고, 축구심판을 지낸 든든한 지원군 남편은 초를 쟀다. 본격적으로 판을 벌린 김씨 부부의 모습에 어떤 시민은 유명 선수인 줄 사진을 찍었고, 스케이트를 타러 나왔던 다른 가족은 슬며시 자리를 피해줬다. 경포호수도 자주 돌았는데 여유로운 그곳에서 전력질주를 하는 이는 김씨밖에 없었다.
그렇게 김씨는 2021시즌 K리그2에 부심으로 재입성하면서 다시 한번 성별의 벽을 무너뜨렸다. 그 사이 김씨는 국내 여성심판 최초로 AFC 주최 남자 성인 프로팀 경기에 참가했고, 2015·2019 두 번의 여자월드컵을 더 경험했다. 이제 올해로 22년차, 어느 새 최고참급 심판이다. 국내 국제심판 가운데 남녀를 통틀어 연차가 제일 높고, 어느 경기장을 가든 대부분 후배 심판들과 심판을 본다.
여성심판이 별로 없는 것은 못내 아쉽다. “관심이 없으면 축구에 여자심판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심판이 많은 WK리그는 TV중계를 거의 안 하고, 김씨처럼 남성 경기에 등장하는 여성심판도 드물다. 심판 수 자체도 적다. 대한축구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활동한 1급 축구심판 394명 가운데 여성심판은 27명에 불과하다. 여성의 비중은 2018년 7.5%에서 2019년 7.3%, 2020년 6.9%로 하락 추세다. “선수가 아니면 여성심판이 활동하는 모습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어요. 눈으로 보여지는 게 일단 제일 중요하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운동장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엄마 손을 잡고 K리그 경기장에 온 아이들에게 ‘나도 심판하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도록요.”
김씨의 다음 목표는 2023년 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이다. 김씨는 지금까지 총 4번의 월드컵에 참가했다. 5회 연속 월드컵 참여는 한국축구에선 없던 기록이다. “목표라기보다 ‘욕심’이에요. 월드컵 4회 참여는 홍명보 감독님과 황선홍 감독님, 그리고 저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5번째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1차 후보 명단에는 들었어요. 2023년에는 완벽히 준비를 마칠 거예요. 욕심을 좀 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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