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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맞춤법보다 틀려먹은 마음들이 고통스럽다

입력
2021.03.05 22:00
수정
2021.03.06 16:38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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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종종 질문을 받는다. 맞춤법이나 단어 오남용 같은 걸 보면 참기 힘들지 않냐고. 글을 고치고 다듬는 일을 하다 보니 유사한 직업병에 시달리겠거니 추측하는 모양이다. 그들의 짐작과 달리 나는 ‘일상의 언어들’에 무감한 편이다. 물론 출판사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몇 년간은 잘못된 맞춤법 자막을 보거나 주술 관계가 부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기자의 리포트를 듣는 게 고역스러웠다. 아무렇지 않게 비문을 써대는 어느 유명 소설가의 원고를 검토하는 건 차라리 공포 체험에 가까웠다.

같은 일을 20년 넘게 해온 지금은 다르다. 가령 누군가가 “이 프로젝트 성공의 장본인은 바로 나야”라거나 “어차피 너나 나나 도찐개찐이야”라고 말한다 한들 거슬리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쉽게 넘겨지지 않는 말이 한두 개는 있을 터, '어쨌든'이란 부사가 나에게는 그랬다. 이 단어로 인해 대판 싸움까지 벌였다.

미국 유명 팝가수가 쓴 소설의 한국어 판권을 어렵사리 황소자리에서 따냈다. 총 3권으로 기획된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은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밀리언셀러가 되었고, 한국어판 역시 순항을 시작했다. 문제는 6개월 시차를 두고 미국에서 출간된 두 번째 작품에서 벌어졌다. 곧바로 원고를 입수할 수 있을 거라는 저작권사의 말에 따라 1, 2권을 한꺼번에 계약했는데, 영문판이 출간된 지 몇 달이 지나고도 번역용 원고가 도착하지 않았다. 담당 편집자는 애가 타서 저작권 대행사에 수시로 문의를 하는 눈치였다. 이 작품에 맞춰 작업일정을 조율해놓았던 번역자 선생님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후 일 년 가까이 이쪽에서는 원고를 독촉하고, 저쪽에서는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을 반복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울먹이는 편집자를 보다 못한 나는 해외판권 중개업무를 총괄한다는 이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하는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곧장 답장이 왔다. ‘이런 일이 발생한 줄 몰랐다. Afer all, 어쨌든 알겠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비위가 뒤틀렸다. 계약 기간 5년 중 1년 6개월을 발만 동동 구르며 허송세월한 당사자에게 사과 한마디 없이 ‘Afer all’이라고? 알량한 인내심은 그걸로 바닥나버렸다. 우리 편집자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시라고 요구하는 이메일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전화를 걸어 따졌다. ‘After all, 어쨌든’은 그이의 관용어인 듯했다. 나와 통화하는 중에도 세 차례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쌀쌀맞게 물고 늘어졌다. ‘그쪽의 업무 과실로 인해 계약 기간의 30%를 날려버린 우리에게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 당신이 구사하는 그 언어가 얼마나 무책임한지 정말 모르시는 거냐?’ 한참을 듣기만 하던 그가 나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고, 그제야 제정신이 된 나는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일이 생겨 고향에 다녀오는 기차 안에서 위아래로 소개된 두 청춘의 죽음을 확인했다. 23세 변희수와 19세 치알 신. 먹먹한 눈길로 기사를 읽고는 습관적으로 댓글을 일별하다 혼자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건 아니잖아.” 어떤 이유로든 젊은이가 목숨을 내어놓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분분하게 날리는 저 야멸찬 말들이라니. 틀린 맞춤법이 아니라 틀려먹은 저 마음들을 보는 일이 나는 못 견디게 싫다. 지금 이 세상은 단단히 잘못되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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