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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새치기

입력
2021.03.05 18:0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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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5일 경기 수원시 한 병원에서 의료진이 코로나19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주사기에 담고 있다. 수원=뉴시스

5일 경기 수원시 한 병원에서 의료진이 코로나19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주사기에 담고 있다. 수원=뉴시스


의료진의 훈련이 충분하게 돼있고 모니터링 체계가 잘 갖춰져 있는 우리나라에선 ‘백신 새치기’는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방역당국을 머쓱하게 하는 일이 생겼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첫날인 지난달 26일 경기도의 한 요양병원에서 병원 이사장의 가족ㆍ지인 10명이 접종 대상자가 아닌데도 백신을 맞은 사실이 적발된 것이다. 당국이 이를 방역행정의 신뢰성을 흔드는 행위로 간주하고 형사고발 등 일벌백계의 대응 방침을 정한 건 당연한 조치다.

□ 보건당국의 수장들이 지인들에게 먼저 백신을 맞힌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신 새치기가 정치 스캔들로까지 비화된 일부 국가들에 비하면 사실 이번 일은 해프닝 정도다. “선장은 마지막까지 배에 남는다”며 나중에 백신을 맞겠다던 페루의 보건장관은 백신을 먼저 맞은 사실이 알려져 경질됐고, 요양시설에 있는 80대 모친에게 백신을 맞도록 한 에콰도르 보건장관도 검찰 수사를 받다가 불명예 퇴진했다.

□ 새치기 문화의 유무는 공동체 윤리의 건강성을 가늠하게 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우리나라에 ‘새치기’란 말이 등장한 시기가 규범이 부재하던 해방공간이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변신하고 사회지도층들이 적산물자와 미군물자를 빼돌려 폭리를 취하던 당시 ‘새치기’는 ‘얌생이질, 빽, 밀매, 모리배’ 등과 함께 이들의 기회주의적 행태를 비꼬는 신어(新語)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놀이공원의 패스트트랙 서비스, 의회의 공청회 방청 대리 줄서기 사업 등 시장주의가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새치기’에 문제를 제기하며 시장의 공정성과 인간 존엄성의 관계를 다룬 바 있다. 샌델 교수의 논리를 빌리자면 팬데믹 종식의 황금반지인 백신의 접종 순서는 시장의 논리나 권력 관계에 따라 뒤바뀌거나 거래돼서는 안 될 절대적 자원이다. 자원 분배의 공정성 문제는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드러난다. 공동체의 품격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이왕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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