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아픈 아이들의 '날개'가 되다

입력
2021.03.08 04:30
23면
0 0

Frank Shankwitz(1943.3.8~ 2021.1.24)

애리조나 고속도로 기동순찰대원 프랭크 생크위츠는 1979년 백혈병 어린이 크리스와의 우정을 계기로, 난치-불치병 어린이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비영리 단체 '메이크 어 위시 재단(Make a Wish Foundation)'을 설립했다. 그 사이 재단은 미국과 한국을 포함, 전세계 36개국에 지부를 두고 38분마다 한 명 꼴로 어린이의 소망을 이루어주고 가족 등 남은 이들을 위로하며 세상에 온기를 전했다. 79년의 프랭크와 크리스. Make a Wish Foundation.

애리조나 고속도로 기동순찰대원 프랭크 생크위츠는 1979년 백혈병 어린이 크리스와의 우정을 계기로, 난치-불치병 어린이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비영리 단체 '메이크 어 위시 재단(Make a Wish Foundation)'을 설립했다. 그 사이 재단은 미국과 한국을 포함, 전세계 36개국에 지부를 두고 38분마다 한 명 꼴로 어린이의 소망을 이루어주고 가족 등 남은 이들을 위로하며 세상에 온기를 전했다. 79년의 프랭크와 크리스. Make a Wish Foundation.


'기동순찰대'란 제목으로 1981년 한국에 소개된 미국 NBC TV시리즈 'CHiPs'는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CHP) 대원들의 활약을 그린 인기 드라마로 77~83년 총 139화가 방영됐다. 특히 아이들이 열광했다. 그들은 슈퍼맨과 달리 실재하는 히어로였다. 1979년 2월 백혈병 진단을 받은 애리조나 주 스코츠데일의 모자가정 7세 소년 크리스 그레이셔스(Christopher "Chris" Greicius)의 꿈도 대형 모터바이크로 도로를 누비며 악당을 소탕하는 거였다.

병이 악화해 세발바이크로 '악당'을 쫓기도 힘겨워진 이듬해 봄, 세관에 다니던 크리스 가족의 한 지인이 애리조나 주 경찰청(DPS) 친구(Ron Cox, 당시 총경)에게 그 사연을 알렸다. 치안국은 1980년 4월 29일 크리스가 입원한 병원으로 경찰 헬기를 띄웠다. 헬기는 감격에 넋이 나간 크리스를 태우고 피닉스 상공을 한 바퀴 선회한 뒤 애리조나 순찰대 본부로 향했다.

37세 치안국 CHP 엘리트 대원 프랭크 생크위츠(Frank Shankwitz)가 크리스를 맞이했다. 그날 크리스는 프랭크와 함께 바이크에 검처럼 붙어 앉아 경광등과 사이렌 버튼을 눌러대며 원없이 도로를 질주했고, 연신 풍선검을 불어대 '풍선검 꼬마 대원(Little Bubble Gum Trooper)'이란 별명도 얻었다. 도파민에 취한 크리스는 그날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밤을 보냈다. 행복 호르몬에 덩달아 중독된 프랭크는 CHP 제복 납품업체에 도움을 청했고, 재단사는 밤을 새워 크리스의 제복을 제작했다. 프랭크는 다음 날, 그 옷을 들고 들고 크리스를 만나러 갔다. "숨도 못 쉴 만큼 흥분"한 크리스에게 프랭크는 "진짜 기동순찰대가 되려면 주행 심사에 통과해 윙(Wing) 배지를 달아야 한다"며 크리스를 데리고 마당에 나섰다. 갈고 닦은 크리스의 세발바이크 주행 실력은 탁월했다.

애리조나 주 경찰청은 '공식 경찰장'으로
주 최초-유일-최연소 명예 순찰대원 크리스와 영결했다.

다시 다음날 프랭크는 윙 배지를 들고 병원으로 갔다. 혼수상태에 들었다가 잠깐 정신을 차린 크리스는 제복에 달린 윙 배지를 보곤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했고, "그 환한 웃음이 병실 전체를 밝혀주는 듯했다"고 한다. 얼마 뒤 크리스는 숨졌다. 애리조나 주 경찰청은 공식 경찰장으로 주 최초-유일-최연소 명예 순찰대원 크리스와 영결했다. 프랭크와 순찰대원들이 운구 행렬을 선도했고, 크리스는 윙 배지 제복 차림으로 묻혔다.

배터리 세발바이크를 타고 마당에서 주행시험을 치르는 1979년의 크리스. 프랭크 생크위츠 사진.

배터리 세발바이크를 타고 마당에서 주행시험을 치르는 1979년의 크리스. 프랭크 생크위츠 사진.


애리조나 템파의 집으로 돌아오며 프랭크는 크리스와 보낸 며칠의 기적같은 시간을 반추했다. 그들이 크리스에게 준 것보다 더 벅찬 기쁨을 크리스에게서 받은 사실도 깨달았다. 그와 아내 키티(Kitty), 동료 스코트(Scott Stahl)는 프랭크의 집 부엌에서 '제2, 제3의 크리스'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고, 맨 먼저 크리스의 어머니 린다 폴링(Linda Pauling)에게 동참을 청했다.

그렇게 6개월 뒤, '메이크 어 위시 재단(Make A Wish Foundation, 이하 위시재단)'이 탄생했다. 프랭크가 회장을 맡은 첫 3년 동안 재단은 15명 어린이의 생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냈고, 2020년 말 현재 미국 전역 64곳과 5대륙 36개국에 지부를 두고 매 38분마다 1명 꼴인 약 50여 만 명의 중증 어린이 환자의 꿈을 이루어주었다. 그럼으로써 부모 등 남은 이들도 위로하고 격려했고, 숱한 뭉클한 사연들로 세상 한 켠을 데웠다. 위시재단 설립자 프랭크 생크위츠가 1월 24일 식도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

그는 길 위에서 유년의 자신을 만나곤 했다

프랭크에게 크리스가 처음은 아니었다. 1972년 주 경찰에 입문해 순찰차와 기동경찰대를 거쳐 75년 주 전역을 경계없이 누비는 10인 엘리트 기동대에 합류한 그는 휴무 때마다 지역 초-중등학교를 돌며 생활 치안과 교통 질서, 장애아 운동 지도에 헌신했고, 특히 청소년에게 인기 있던 모터바이크 안전교육에 힘썼다.

그 열정은 유년기 자신의 시린 기억에 대한 보상의 의미였을지 모른다. 시카고의 세일즈맨 아버지와 웨이트리스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프랭크는 만 2세 때 부모가 이혼한 뒤로 약 10년간 대부분의 시간을 사실상 '홈리스'로, 웨이트리스 어머니와 함께 주 전역을 떠돌며 살아야 했다. 어머니는 이혼과 함께 양육권을 얻었지만 얼마 뒤 크리스를 전남편 집 현관에 두고 떠났고, 5세 무렵 다시 불쑥 유치원으로 찾아와 데려갔다. 어머니 차 뒷좌석에서, 간이 천막에서 먹고 자는 떠돌이 생활이 그렇게 시작됐다. 경찰과 함께 수배에 나선 전남편에게 붙들려 아이를 돌려줬다가 다시 데려가는 생활의 반복. 프랭크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엔 뭘 먹을 수 있을지 늘 걱정하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그를 완전히 포기한 건 프랭크가 만 12세 되던 무렵이었다. 그는 어렵사리 고교를 마치고 공군에 입대, 영국 주둔군 헌병 등으로 5년을 복무한 뒤 65년 귀국해 모토롤라에 입사했고, 70년 결혼하고 야간대에 진학해 학사학위도 받았다. 그리고 72년, 한 고교 동창의 권유에 이끌려 애리조나 고속도로 순찰대원이 됐다. 유년기 어머니와 떠돌던 그 길 위에서 그는 과거의 자신같은 아이들을 만나곤 했고, 아이들과의 탁월한 교감 능력으로 경찰 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크리스의 멘토로 선발된 것도 그런 사연 덕이었다.

재단은 가난한 중증 어린이 환자들의 사연을 받아, 재단이 도울 수 있는 꿈을 지닌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의 꿈은 대체로 소박했다. 그들은 헐한 뭔가를 갖고 싶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고, 뭔가가 되고 싶고, 어딘가에 가보고 싶어했다.

재단 출범 후 첫 '위시 키드(Wish Kid)'로 뽑혀 피닉스 소방대원 체험을 하게 된 7세 소년 밥시 살라자르(왼쪽).

재단 출범 후 첫 '위시 키드(Wish Kid)'로 뽑혀 피닉스 소방대원 체험을 하게 된 7세 소년 밥시 살라자르(왼쪽).


재단 출범 후 첫 대상자는 78년 백혈병 진단을 받고 말기 증상을 겪던 만 7세 소년 프랭크 "밥시" 살라자르(Frank "Bobsy" Salazar)였다. 26세 가난한 어머니와 단 둘이 살던 밥시의 소원은 세 가지였다. 열기구 타보기, 디즈니랜드 가보기, 소방차 타보기. 재단은 밥시의 소원 두 개를 이루어주면서 디즈니사와 오랜 결연관계를 맺었다. 재단의 요청에 피닉스 소방본부도 반색하며 밥시를 초대, 방화복을 입고 호스로 물을 쏴보게 했다. 81년 4월 밥시가 위독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소방대는 밥시가 입원한 '성 요셉 병원'으로 사다리차를 급파했다. 소방대원 네 명은 사다리를 타고 창을 통해 밥시의 병실에 진입해 '어린 동료'와 극적으로 해후했다. 밥은 "내려가서 내 팀과 합류하겠다"고 졸랐고, 'B1(밥시 1호차)'이란 임시 코드번호를 새긴 소방차가 병원 건물 꼭대기까지 사다리를 뻗어 올리는 작전을 함께 수행했다. "나 진짜 소방관이 된 건가요?" "물론이지!" 배지의 윙을 달고 세상을 떠난 크리스처럼, 밥시는 소방 사다리를 타고 다음날 하늘로 갔다. 그 윙과 사다리는 남은 이들에게도 힘과 용기를 선사했다. 크리스의 어머니는 재단 공동설립자 겸 활동가(wish coordinator)로 헌신해왔고, 밥시의 어머니는 대학에 진학해 91넌 박사학위를 받고 2002년 노던애리조나대 교수가 됐다.

무급 회장- 무급 활동가로 평생을 헌신하다

낮에는 기동경찰대로, 밤과 휴일에는 재단 대표로 일하던 프랭크는 83년 말 마약반으로 전출돼 위장요원 임무를 맡으면서 회장직을 사임했다. 그 무렵엔 언론 보도를 통해 재단 활동이 알려져 지부 설립 및 봉사 자원 요청이 쇄도했다. 무급 회장이 이끌던 '아마추어' 재단은 84년부터 유급의 전임(專任) '프로페셔널' 회장이 이끄는 전문 봉사 NGO로 변신했고, 규모도 활약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강력범죄 살인전담반 형사로 96년 은퇴한 프랭크는 2001년까지 특수수사대 계약직 베테랑 형사(reserve detective)로, 프레스코트(Prescott) 시 경찰국 미결 살인수사팀 형사로 만 42년을 복무하면서 줄곧 재단 일을 거들었고, 단 한 푼의 대가도 받지 않았다. 그는 "경찰관으로 월급 받으면서, 시민들이 낸 기부금에서 따로 급여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사이 프랭크는 위시재단과 별개로, 질병을 이겨낸 아이 등 생존자 교육과 생계를 후원하는 '소망 이후(After the Wish) 재단'을, 연령 제한 없이 딱한 이들의 소박한 꿈을 공동체가 함께 이루도록 돕는 '잔물결 재단 Ripple Effect Foundation'을, 지역 모터바이크 동호인들의 박애 봉사모임 '소망 라이더 재단(Wish Riders Foundation)'을, 부상 경찰관과 가족을 돕는 '부상 경찰(Wounded Blue)'이란 비영리단체를 동료들과 함께 설립했다.

좋은 가정을 이뤄 좋은 아버지, 멋진 카우보이가 되고 싶었다는 프랭크 생크위츠는 병 때문에 그 소원의 기회를 박탈당할지 모르는 아이들의 가난한 꿈을 위해 생을 바침으로써 더 크고 값진 꿈을 이뤘다. 가족 사진.

좋은 가정을 이뤄 좋은 아버지, 멋진 카우보이가 되고 싶었다는 프랭크 생크위츠는 병 때문에 그 소원의 기회를 박탈당할지 모르는 아이들의 가난한 꿈을 위해 생을 바침으로써 더 크고 값진 꿈을 이뤘다. 가족 사진.


프랭크는 여느 성직자만큼 자주, 그것도 특별한 우정을 나눈 아이들의 장례식장을 찾아다니곤 했을 것이다. 그 안타까움과 슬픔의 힘으로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선사할 기운을 회복하곤 했을 것이다. 그와 재단 이야기는 몇 권의 책과 다큐멘터리(Stickability(2013), Wish Man(2019))'로 만들어졌다. 프랭크가 거들고 프레스코트 고교 동창생인 작가 레이철 스파크스(Rachelle Sparks)가 쓴 2013년 책 'Once Upon A Wish'는 스파크스가 재단과 인연을 맺은 50개 가정을 인터뷰하고 그중 8개 사연을 중점적으로 소개한 책이다. 프랭크는 "아이들뿐 아니라 가족들의 오르내리는 감정을 정직하게 담아 달라는 게 내 요구이자 바람이었다"고, "꿈(소원)의 힘은 온 가족에게 미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 그는 재단 모금 강연에 전념했다. 젊어서부터 해온 그의 강연 솜씨는 탁월했고, 무엇보다 사연 보따리가 탐스럽고 풍성했다. 2017년 인터뷰에서 그는 "지난해 포브스 선정 '미국 최고 인기 강연자 Top 10'에 뽑히기도 했다"고 은근히 자랑했지만, 매체 편집자는 "사실 그가 1위였다"는 주석을 달았다. 그는 대통령 봉사상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상을 탔고, 한 차례 이혼-재혼하며 두 딸을 낳아 키웠다. 그리고, 평범한 가정을 이뤄 좋은 아버지가 되고, 멋진 '카우보이'가 되겠다던 젊은 날의 꿈보다 훨씬 큰 꿈을, 수많은 이들의 꿈과 함께 이루었다.

2016년 인터뷰에서 그는, 떠돌이 시절 자신을 보살펴주며 누군가를 돕는 일의 가치를 일깨워준 낯선 이웃들의 기억, 78년 만취 난폭운전자를 추적하다 바이크 전복사고로 절명 위기에 빠진 그의 심장을 응급조치로 다시 뛰게 해준 한 간호사의 헌신, 무엇보다 크리스의 한없이 행복한 웃음에 삶을 빚졌다고 말했다. 그 빚들을 함께 갚아 달라는 게, 그의 마지막 소원이었을 것이다.


비영리 NGO들이 겪는 성장통

비영리 공익 NGO도 연륜이 쌓이고 몸집이 커지면 출범 초기의 아마추어적 열정과 직업적-전문적 효율이 충돌하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게 도약의 발판이 될 수도, 변질-타락의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아마추어적 열정과 전문적 효율은 자주 상충하지만, 함께 구르지 않으면 삐걱거리기 쉬운 두 바퀴라는 점이 비영리 NGO의 근본적인 어려움 중 하나일 것이다. 당장 유급 활동가가 늘고 사업 규모가 커지면 모금(경영)에 능한 이들의 발언권이 커지기 마련이다. 거기에 출세나 돈 같은 사적 욕망이 개입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생크위츠가 숨지기 사흘 전인 1월 21일 '위시재단' 아이오와지부 전(前)지부장이 1급 공금횡령 및 법인카드 유용 혐의로 구속됐다. 근년 한국의 정신대대책협의회와 정의기억연대를 둘러싼 잡음도 저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경우, 국세청(IRS)이 내국세 면세기관으로 인정한 '501(c)(3)' 조항의 비영리공익단체'는 연 수입 100만 달러 이상(모금 50만 달러 이상)이면 자금 운용 내역 등을 양식(Form 990)에 맞춰 매년 신고해야 한다. 그 공개자료를 분석해 NGO들의 윤리성과 재정 건전성을 평가하는, 다시 말해 시민들에게 후원 단체를 선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시민단체도 여러 개다. 2001년 설립된 대표적인 비영리 NGO 평가 단체인 'Charity Navigator'가 주목하는 항목도 재정 건전성과 운용 신뢰도, 투명성이다. 구체적으로는 총 지출에서 사업에 쓴 돈의 비율, 직원 급여 등 운영비 비율, 후원금 모금에 쓴 돈의 비율, 최근 3~5년 기본수입(Primary revenue) 성장률, 현 지출규모를 기준으로 현재 자산으로 얼마나 활동이 가능한지를 알려주는 운영자본회전율(Working capital ratio) 등이다.

지부별 독립 단체로 운영되는 '위시재단'은 대부분 별 3~4개(4개가 최고)로 대체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위시재단 한국지부도 2003년 설립돼 매년 300명 남짓 어린이들의 소원을 이뤄주고 있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