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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일 "5·18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마음 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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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일 "5·18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마음 담았죠"

입력
2021.03.04 16:53
수정
2021.03.04 17:01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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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일. 유니버설뮤직 제공

정재일. 유니버설뮤직 제공

동틀 녘의 하늘처럼 정적을 뚫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라틴어 합창이 기도하듯 조심스럽게 신을 찾는다.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시편 26편 9절을 인용한 ’26.9’로 시작한 기도는 ‘기억하라(momorare)’는 독창과 흐느끼는 듯한 울부짖음(‘Be Not Depart From Me’)으로 이어진다.

신을 향한 애원일까, 고통스러운 절규일까, 죽은 자를 애도하는 탄식일까. 기독교 합창곡처럼 시작한 음악은 새벽안개처럼 자욱한 전자음(‘Why Do You Stand Afar’)을 뚫고 소리꾼 정은혜의 구음을 터트린다.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고 소멸과 기억,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씻김굿과 미사곡의 크로스오버.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한 60여분간의 고요한 몸부림은 시편 89편48절로 귀결된다. ‘기억하소서. 제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당신께서 모든 사람을 얼마나 헛되이 창조하셨는지를.’

영화 ‘기생충’ 음악감독으로 유명한 정재일이 10년 만에 발표한 정규 3집 ‘시편(Psalms)’은 제례의 뜻을 담은 무용극 한편을 본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앨범이다. 실제로 정재일은 지난해 5ㆍ18민주화운동 40주년 헌정 음악을 마친 뒤 장민승 감독의 시청각 프로젝트 ‘둥글게 둥글게’를 위해 만들었던 음악을 다시 만져 이번 앨범에 실었다. ‘둥글게 둥글게’는 1980년 5ㆍ18을 중심으로 1979년 부마민주항쟁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흔적을 담은 작품. 그래서 이번 앨범의 중심에 5ㆍ18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5ㆍ18 40주년 헌정 음악을 의뢰 받았을 때 그는 오랜 시간 고민했다고 했다. ‘나 같은 일개 작곡가가 아직 충분히 치유되지 못한 무겁고 깊은 상처에 감히 다가가도 되는 것일까.’ 정재일은 ‘추모’나 ‘위로’가 아닌 ‘기억’을 택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비극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행위가 더 중요하다 생각한 것이다. 최근 서면으로 만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옛 국군광주병원, 광주교도소 등 곧 철거되고 자취도 없이 사라질 흔적들이 어떻게 기억돼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황망함, 아무것도 더하지 않고 그대로 올곧게 기억하고자 하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기억한다는 행위와 잊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시편 구절로만 가사를 쓴 이번 앨범의 주인공은 ‘목소리’다. 정재일은 합창과 구음의 이질적인 조화를 실험하면서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는 “언제나 사람의 목소리가 최고의 악기라 생각했다”며 "장민승 작가가 들려준 시편의 여러 구절을 읽으며 신을 향한 인간의 기도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됐고 이번 앨범엔 그냥 이 기도만, 사람의 목소리만 담아보자고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정재일은 일찍이 대중음악계에서 천재로 불렸다. 열일곱의 나이에 기타리스트 한상원의 눈에 띄어 이적, 정원영 등과 함께 슈퍼밴드 긱스의 일원이 됐다. 이후 박효신 김동률 등에게 곡을 주는 작곡가로 활동하는 한편 ‘기생충’ ‘옥자’ 등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비롯해 연극, 무용, 미술 등 다양한 장르와 협업했다.

“‘싱어송’을 하기엔 노래 실력이 처참한 수준이고 ‘라이터’를 하기에 초등학생 일기 수준의 글솜씨”여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할 생각은 없단다. “필름이나 퍼포먼스와 결합해 그 순간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쪽에 내 재주가 더 많이 쓰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에 앞으로도 다른 장르의 예술에 대해 음악으로 답하는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다.

“제 일은 어딜 가나 아주 잘 들어야 합니다. 영화는 연출자의 의도와 화면이 내게 해주는 이야기를, 무용은 무용수의 움직임을 들어야죠. 그래서 항상 초보자의 마음으로 긴장하며 많은 이야기를 주워담으려 노력합니다. 원래 말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바람직한 작업 방식인 듯합니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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