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스포츠카를 만드는 방법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하지만 영국의 스포츠카 브랜드, 로터스의 방법은 단 한가지다. 강력한 엔진이나 뛰어난 구조에 대한 구현 이전에 ‘더욱 가볍고’ 그리고 ‘더욱 경쾌하게’ 만드는 것이 그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로터스 브랜드의 시작에서는 가장 화려하고 돋보이는 기조였고 이후 이어지는 시간 속에 마주한 정점, 그리고 위기를 거치면서도 변치 않은 방법이었고 철학이었다.
어느새 전기 스포츠카, 에비야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로터스는 어떤 과거를 품고 있을까?
키트카로 시장의 문을 연 ‘로터스’
로터스의 역사는 1948년으로 올라간다. 1928년생 콜린 채프먼(Anthony Colin Bruce Chapman)은 1930년형 오스틴 세븐을 개조해 첫 번째 자동차 ‘Mk1’을 제작하며 ‘자동차 개발 능력’을 입증했다. 게다가 단순히 차량을 개발한 것에 그치지 않고 지역 단위긴 했으나 실제 레이스에 출전, 우승을 거두는 쾌거를 누리기도 했다.
콜린 채프먼의 능력은 곧바로 입증되었고 레이스를 이어가며 얻은 상금과 1952년, 연인인 하젤 윌리엄스의 재정 지원을 바탕으로 ‘로터스 엔지니어링’이라는 자동차 및 모터스포츠 엔지니어링 업체의 간판을 올렸다.
로터스 엔지니어링은 콜린 채프먼의 자동차 제작 기조, 즉 ‘경량화가 성능을 이끈다’는 슬로건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고, 이후 Mk6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차량을 선보이며 영국 키트카,스포츠카 시장에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지게 되었다.
참고로 흔히 ‘케이터햄 세븐’으로도 널리 알려진 로터스 Mk7은 근대의 로터스 엔지니어링이 가진 기술력의 방점과 같았다. 경쾌한 차체와 우수한 파워트레인 및 선진화된 서스펜션 시스템 등이 어루러져 우수한 주행 성능을 과시했고, 아직까지도 그 마니아들이 전세계에 퍼쳐있다.
모터스포츠의 도전한 ‘팀 로터스’
콜린 채프먼의 의지는 확고했고, 자신의 자동차 개발 기조에 대한 증명을 받고자 했다. 이에 로터스는 1954년, 로터스 엔지니어링에서 팀 로터스를 분리, 독자적인 활동 아래 모터스포츠 무대에 참전의 의지를 밝혔다.
초기에는 로터스 Mk8를 앞세워 F2 그랑프리에 출전을 하며 ‘모터스포츠에 대한 실전 경험’ 그리고 ‘모터스포츠 정점’에 대한 노하우를 착실히 쌓아 올렸다. 특히 1957년의 ‘엘리트’는 경량화의 힘을 확실히 입증했고, 르망 24시간 내구 레이스에서도 ‘6년 연속’ 클래스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덧붙여 1958년에는 팀 로터스의 이름으로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출전, F1 그랑프리에서의 ‘로터스’를 각인시키게 되었다. 특히 앞쪽에 엔진을 배치한 로터스 타입 12는 등장과 함께 많은 기대, 관심을 받았다.
게다가 1960년에는 미드십 구조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데뷔와 함께 호성적을 이어갔을 뿐 아니라 롭워키 팀을 이끌던 스털링 모스 역시 레이스카를 교체, 곧바로 모나코에서 페라리 팀을 억누르는 ‘강렬함’을 제시했다.
경량화, 그리고 기술의 진보를 말하다
팀 로터스는 F1 무대에서 말 그대로 ‘경량화의 가치’ 그리고 ‘기술 혁신’의 아이콘과 같았다.
실제 로터스는 1962년 타입 25를 통해 스페이스 프레임을 대체하는 ‘모노코크 섀시’를 선보였고, 1967년에는 코스워스-포드 엔진을 바탕으로 ‘코스워스 엔진의 전성시대’를 이끌기도 하며 기술의 최전선에 나섰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1970년대에도 이어졌다.
타입 72가 등장해 인보드 프론트 브레이크 시스템과 라디에이터 등의 형태 및 위치를 옮겨 ‘공기역학’에 대한 확신과 비전을 제시했고, 타입 79 MkⅣ는 후대에도 거론될 ‘그라운드 이펙트’의 완벽한 구현을 이뤄냈다.
이를 바탕으로 1960년대부터 1970년대 말까지 F1 컨스트럭터 챔피언과 6번의 드라이버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쾌거를 누리고, F1 외에도 수 많은 레이스에서 그 실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모터스포츠를 일상으로 옮기다
팀 로터스의 활약은 로터스의 양산 차량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루프를 얹고 파이버글래스를 사용한 엘리트가 그랬고, 1962년에는 경쾌한 스포츠 드라이빙과 유려한 디자인의 엘란이 등장해 이목을 지붕시켰다.
여기에 르노의 엔진을 얹은 유로파가 1966년에 데뷔해 경쾌한 움직임을 한껏 과시했고, 1974년의 엘리트는 F2 엔진에 기반으로 한 직렬 4기통 엔진을 통해 155마력과 민첩한 움직임을 제시했다.
덧붙여 1975년에는 로터스의 미드십 슈퍼카이자 현재까지도 전설로 이어지는 ‘에스프리’가 등장하며 자동차 마니아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열광하게 만들었다. 덧붙여 Mk7, 즉 로터스 7은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꾸준한 인기를 누리며 ‘로터스의 효자’를 자처했다.
위기, 그리고 도전을 이어간 로터스
전세계 자동차 브랜드가 그렇듯 늘 ‘오너가 모터스포츠에 집중하면’ 기업의 경영 환경이 나빠진다는 악순환이 있다. 로터스 역시 마찬가지다. 오일쇼크, 경제 대공황, 그리고 사회의 발전 등이 이어지며 1970년대 초반, 로터스의 경영은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로터스는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브랜드의 효자를 자처했던 로터스 7에 대한 기술과 상표권을 케이터햄에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이어지는 신차 개발은 어딘가 아쉬운 모습이 가득해 시장에서의 반응이 좋지 못했다.
게다가 미국의 드로이언과 함께 DMC-12를 개발하고, 이를 위해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공장을 세우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영국 정부 및 국세청과의 법적 다툼 및 거액의 과징금 등을 물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대신 1982년, 로터스는 토요타와 협력하며 ‘안정화의 기반’을 쌓게 되었다.
특히 콜린 채프먼이 사망한 1982년 이후, 로터스의 신차들은 어딘가 방향성을 잊은 모습이었다. 특히 1989년에 공개된 엘란은 디자인과 핸들링 퍼포먼스를 갖췄지마 엔진과 전륜구동으로 인해 ‘스포츠카’의 기준에서 벗어났고 마쯔다 MX-5의 영국 진출에 맥없이 무너졌다.
이런 과정에서 1986년 GM에 품에 안기고, 또 1993년에는 부가티에 속하는 등 ‘사업 전략’의 방향성이 혼재되었으며 1996년에는 말레이시아의 프로톤 모터스에 속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프로톤은 ‘로터스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장하며 ‘다시 한 번 로터스다운 로터스’가 등장할 수 있었다.
실제 프로톤은 로터스 엘리스의 개발 및 마케팅에 대해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는 로터스 브랜드의 부흥을 이끌었다. 덕분에 애스턴마틴, 그리고 오펠 스피드스터 등의 ‘개발 외주’ 등을 도맡기도 하는 등 ‘다시 한 번 로터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듯 했다. 다만 해당 업무의 행보와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다채로운 스포츠카, 그리고 에비야
21세기에 접어든 로터스는 엘리스와 엑시지, 그리고 4인승 모델인 에보라 등을 선보이며 컴팩트 모델부터 중형의 스포츠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로터스의 매력을 제시할 수 있도록 했다.
로터스는 시대의 흐름, 안전 규제 등에 대한 대응을 이어가며 꾸준히 각 스포츠카들을 업데이트하고 에디션 모델 등을 선보이며 소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뿐 아니라 ‘스포츠카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강조하고 있다.
그와 중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발생했다. 지난 2010년 프로톤에게 ‘로터스’라는 브랜드의 사용권을 획득한 사업가 ‘토니 페르난데즈’로 인해 ‘로터스와 관계가 없는’ 로터스 레이싱이 F1 무대에 등장해 실제 로터스와의 법정 공방을 이어가는 등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로터스는 최근 시대의 흐름인 전동화에 대해서도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2019년 영국 런던에 위치한 ‘빅토리아 왕립원예홀(Royal Horticultural Halls)에서 공개된 로터스 에비야는 카본파이버와 알루미늄, 고장력강판 등을 활용한 가벼운 차체에 네 개의 고성능 전기모터를 더해 시스템 합산 1,973마력(2,000 ps)을 구현한 고성능 전기차다.
실제 로터스 에비야는 정지 상태에서 3초 이내의 시간에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고 속도는 320km/h를 상회할 뿐 아니라 주행거리에 집중한 레인지 모드를 시작으로 시티, 투어, 스포츠 그리고 트랙으로 구성되어 드라이빙의 가치를 제시한다.
이렇게 로터스는 내연기관 스포츠카의 방점을 찍을 준비와 함께 미래에 대한 준비를 착실히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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