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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정치판의 졸(卒)이 아니다

입력
2021.02.26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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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이낙연(가운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플랫폼기업 이익공유제 화상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낙연(가운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플랫폼기업 이익공유제 화상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고 싶어서 했겠습니까. 위에서 찍어 누르는데, 당해 낼 재간이 없잖아요.”

6년 전 기억이지만 아직도 또렷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주력 프로젝트로 추진된 ‘창조경제혁신센터’에 참여한 한 대기업 임원의 뒷말이다. 이 임원은 “투자 규모를 마지못해 밝히긴 했지만, 모르긴 해도 제시된 수치에서 10분의 1도 집행되지 않을 것”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억지로 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에 동참시킨 정부를 향한 작심 대응처럼 들렸다.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지방자치단체별로 해당 지역에 걸맞은 창업 생태계를 구축해 신산업까지 이어가자는 취지로 전국 17개 시도에서 15개 주요 대기업이 참여한 가운데 출범했다.

화려하게 출발했지만 현실은 초라하다. 황운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대기업 지원이 아예 끊긴 창조경제혁신센터는 2018년 6곳에서 2019년엔 8곳으로 늘었다. 17개 창조경제혁신센터 가운데 정부의 혈세만으로 운영 중인 곳이 절반 이상이란 얘기다. 국정농단으로 추락한 박근혜 정부와 거리두기에 나선 움직임으로 보이면서도 당초 각 기업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행된 데 따른 반감이 표출됐다는 시각이다. “각 기업에서도 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 이전부터 유사한 자체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었지만 정부의 의지가 워낙 확고했던 터라, 당시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전한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의 귀띔에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최근 재계에선 이와 유사한 형태로 밀려온 난기류에 속앓이가 깊어지고 있다. 연초부터 정치권에서 터져 나온 ‘이익공유제’가 진원지다. 코로나19 수혜 기업들이 자영업자 등을 포함한 피해 업종에 번 돈을 나눠주자는 게 이익공유제의 골자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22일 이익공유제를 주제로 인터넷기업협회와 정보기술(IT) 플랫폼 업체들과 간담회도 가졌다. 특히 ‘자발적 참여’를 주문하는 듯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까지 이어지면서 이익공유제에 대한 무게감은 배가됐다.

문제는 기업들에 밀려온 압박감이다. 정치권에선 이익공유제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강제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기업들엔 오히려 부담만 더해간다. 이익공유제와 관련해 별도 간담회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무거운 짐이다. 기업과 사전 협의도 없이 정치권으로부터 흘러나온 주문은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출범했던 당시와 다를 게 없어서다. 투자 축소나 고용 위축을 포함한 이익공유제의 부작용 등은 애초부터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대 이상의 실적을 달성한 업체가 언론사에 “제발, 기사를 작은 크기로 보도해 달라”는 웃지 못할 부탁까지 하는 촌극도 빚어지고 있다. 마땅히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칭찬을 받아야 할 기업이 오히려 실적 숨기기에 급급하다. 속사정은 뻔하다. 조금이라도 성적표를 낮게 보이면서 ‘이익공유제 기업 리스트’에선 빠져 보겠다는 심산이다.

기업은 정치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업이 바뀌는 정부에 불려 다니면서 희생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재계 관계자들의 넋두리에선 한숨부터 나온다. 형태만 달려졌을 뿐이다. 기업을 정치공학적 셈법으로 흔들어대는 모습은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인 듯하다. 기업은 정치판의 졸(卒)이 아니다.


허재경 산업1팀장

허재경 산업1팀장



허재경 산업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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