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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가족이란 건 없어" 승리호가 그려낸 가족의 미래

입력
2021.02.25 14:5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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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어린이 책은 결코 유치하지 않습니다. ‘꿈꿔본다, 어린이’는 아이만큼이나 어른도 함께 읽으면 더 좋을 어린이 책을 소개합니다. 미디어리터러시 운동을 펼치고 있는 박유신 서울 석관초등학교 교사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영화 승리호의 한 장면.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지만,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아픔을 보듬으며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끈끈한 연대를 그려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승리호의 한 장면.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지만,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아픔을 보듬으며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끈끈한 연대를 그려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얼마 전 넷플릭스의 영화 '승리호'의 반응과 관련해 흥미로운 SNS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국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성 역할의 반전과 소위 ‘정상성 가족’을 벗어난 대안 가족의 연대와 사랑을 발견하는 반면, 해외 관객들은 이 영화가 가족애를 유독 강조하는데 그것이 한국 영화의 특성이구나라는 발견을 한다는 것이다. 2021년 현재, 한국사회가 여전히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안가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한국의 가족주의를 들켰다면, 역시 문화적 산물은 그 사회와 문화의 맥락을 지우려고 애써도 지울 수 없다는 흥미로운 결론에 다다른다.

그렇다면 한국의 어린이들이 읽고, 보고 자라는 책들은 어린이들의 다양한 삶을 아우르고 있을까. 어린이들이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보는 책인 교과용 도서, 즉 교과서의 경우를 살펴보자. '한·일 초등학교 3-4학년 국어교과서의 삽화를 통해 본 양국의 사회·문화적 연구'(이미숙·송정직, 2012, 일본언어문화 제23집)라는 논문에 의하면, 교과서 삽화에 나타난 가족구성원의 경우, 한국이 79회, 일본이 18회로 한국이 4.4배 높으며 교과서 전체적으로 가정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 전개가 일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이에 더하여 교과용 도서에서 남성을 직업인, 여성을 누군가의 부인이나 주부로 표현하는 경향, 여자 어린이의 경우 치마를 착용하는 비율이 일본에 비해서도 상당히 높다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어린이 책 '비밀소원'. 사계절 제공

어린이 책 '비밀소원'. 사계절 제공

현재 사용되는 교과서들이 성역할 등에서 예전보다 진보했다고 해도, 여전히 대부분의 삽화와 이야기들은 엄마와 아빠가 있는 가족을 전제로 전개가 된다. 이는 어린이들의 일상적 독서 경험이나 미디어 경험 안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회가 자라나는 구성원들에게 다양한 삶의 모습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이미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구성원들, 표준에서 벗어난 구성원들은 소외되고 위축될 수 밖에 없다. 따돌림, 학교폭력, 저출산, 혐오 등의 문제들이 과연 이러한 ‘정상성’, ‘가족주의’에 사로잡힌 보수적 가치관과 무관할까. 우리는 어린이들의 독서 경험, 그리고 미디어 경험 안에서 더 많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의 존재를 지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린이책 '비밀 소원'의 주인공들은 한국의 현실에서는 지극히 흔하고 현실적이지만 교과용 도서나 어린이책, 미디어에서는 드물게 제시되는 다양한 삶의 맥락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 미래는 할머니와 비혼주의자 이모와 함께 살아간다. 친구 이랑이는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준비하고 있다. 또 다른 친구 현욱이의 아버지는 은퇴한 야구선수로서 집안일을 한다. 어린이들은 '소원이 주렁주렁'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TV에 출연해서 소원을 이뤄보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들은 그 과정에서 서로 소통하고 성찰하면서 자신의 막연하고 비현실적인 ‘정상화’와 관련된 소원을 비는 대신, 자신이 처한 가족관계를 인정하고, 다른 친구와 가족을 이해하며, 주어진 상황 안에서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는 것을 선택한다. 소원을 빈다고 해서, 돌아가시거나 이미 별거를 시작한 엄마 아빠가 이 아이들에게 ‘정상가족’을 돌려줄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조금 더 자라면 많은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될 수 있는 길이다.

비밀소원·김다노 지음·이윤희 그림·사계절 발행·128쪽·1만2,000원

비밀소원·김다노 지음·이윤희 그림·사계절 발행·128쪽·1만2,000원

미래의 비혼주의자 이모는 미래를 꼭 끌어안으며 “꼭 남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행복한 것은 아니야, 미래야” 라고 이야기 해 준다. 이모의 말은 미래 뿐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많은 어린이, 어른들을 격려한다. 비혼주의자 이모가, 태권도복을 입은 언니가, 헌법 법전을 들고 다니며 조근조근 논리로 어린이들을 보호하는 할머니가, 전직 야구선수지만, 집안일을 하고, 아들에게는 세상 없이 다정한 아버지가, 씩씩하고 현명한 여성 경찰과 여성 PD가 이야기 안에서 아이들을 돕고, 격려하고, 보호하며,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실제로 존재하는, 그러나 주류 서사에서 종종 지워지는 다양한 삶들이 따뜻하고 행복하게 그려져 있다. 아마도 종종 소외되는 많은 어린이 독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환대의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클럽하우스에서 ‘여자 어린이의 책 읽기 경험’ 이라는 주제로 많은 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많은 분들이 나를 좌절시킨, 혹은 나에게 용기를 주고 롤 모델을 제공해 준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중 전통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다양하고 진보적인 어린이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아동문학분야의 시도들이 실제로 지금 성인이 된 이들의 삶에서 큰 영향을 주었다는 고백들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우리는 멈추지 말고, 지금의 한국사회보다 더 나아갈 수 있는, 더 다양한 삶을 끌어안고, 롤모델을 제시하는 더 많은 어린이책과 미디어를 만들고 보급해야 할 것이다. '비밀 소원'은 제 1회 나다움어린이책 창작공모대상 수상작이다. 그리고 마지막 수상작이다.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은 종료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로서는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으려는 견고한 목소리로부터 이 소중한 가치를, 다양한 삶을 어떻게 지켜내는가가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박유신 서울 석관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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