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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은 죽음보다 무겁다..." 쉼보르스카의 초기 미발표 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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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은 죽음보다 무겁다..." 쉼보르스카의 초기 미발표 시들

입력
2021.02.19 04: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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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위대한 시인이 죽었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시들을 만나볼 수 없다. 남은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그가 생전 남긴 시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 쓰다듬는 것뿐이다. 그렇게 체념하고 있을 때, 시인의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원고 뭉치가 발견된다. 세상에 한번도 공개된 적 없던, 시인이 가장 젊었을 적 쓴 시들이.

2012년 타계한 폴란드의 국민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노벨문학상(1996년) 수상 당시 “진정한 시인이라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2012년 타계한 폴란드의 국민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노벨문학상(1996년) 수상 당시 “진정한 시인이라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2012년 2월 1일,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폴란드의 국민 시인이었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2년 뒤 유고 시집 ‘충분하다’가 출간됐다. 쉼보르스카가 눈을 감기 전 완성한 13편의 시에다 미완성 시 6편을 합친 시집이었다. 그것으로 영영 작별이라 생각하고 있던 독자들에게, 시인이 남겨둔 깜짝 선물이 도착했다. 쉼보르스카의 초기 미발표 원고를 모은 유고시집 ‘검은 노래’였다.

쉼보르스카는 1945년 폴란드 데일리에 ‘단어를 찾아서’를 발표하며 스물두 살의 나이로 등단했다. 1949년 등단 시집을 펴낼 예정이었지만 출간이 불발되고 만다. 이후 쉼보르스카는 사회주의리얼리즘만이 예술의 가장 위대한 가치로 떠받들여지던 시대와 과감히 불화하며 독자적 시 세계를 펼쳐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중견 시인으로 자리잡고 있던 1970년, 전남편인 브워데크가 쉼보르카에게 우편을 보내온다. 바로 출간되지 못했던 쉼보르스카의 데뷔 원고뭉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이 시집은 이후에도 출간되지 못했다. 시인이 자신의 재능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사회주의 정권의 검열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이 시집은 시인 타계 이후 그의 대리인으로 오랫동안 활동한 미하우 루시네크 교수가 출판을 결심하면서 세상에 나오게 됐다.

여기까지가 최근 번역된 쉼보르스카의 ‘검은 노래’가 국내 독자와 만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끝과 시작’, ‘충분하다’에 이어 국내에는 세 번째로 번역되는 쉼보르스카의 시집이다. 시인 사후에 발굴된 젊은 시절의 미공개작에다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연대별로 함께 수록됐다.

책에 실린 대부분의 시들이 쓰인 시기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인만큼, 전쟁의 상흔에서부터 탄생된 시들이 많다. 1947년 쓰인 ‘유대인 수송’에서 그는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유대인을 태운 열차를 묘사한다.

“팽팽한 공기 아래 도사린 죽음./철로의 동력에 갇힌 그들의 얼굴이/밀폐된 어둠으로 바뀐다./비명은 소리 없는 납처럼 잠잠해졌다./지면의 깊이를 입증하려는 듯 파헤친 구덩이./(…)/눈물이란 숨을 훔쳐 얻은 것이다./육신은 죽음보다 무겁다.”

검은 노래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발행
  • 212쪽ㆍ1만4,000원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고, 그 참상의 복판에 시인이 서 있었다. 삶이, 시가 하찮아지는 가운데 오히려 시인은 ‘살기 위해’ 시를 썼다.

“싸우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다;/그저 미약한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해,/바람으로부터 그 흔들림을 막아주기 위해서다./(…)/여기서 시(時)를 기다린 건 아니다;/내가 온 건/찾아내고, 낚아채고, 움켜쥐기 위해서다./살기 위해서다.”(‘위령의 날’, 1946)

그러나 다른 이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시인에게 결코 긍지가 될 수 없었다.

“죄와 벌에 대한 아무런 예감 없이/먼지보다 하찮은 순간들로/나는 너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날 용서치 말기를)/마치 꿈속의 그 아이처럼. 벌레처럼.”(‘돌아온 회한’, 1947)

전쟁 세대이자 나치 독일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폴란드의 국민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쉼보르스카는 시를 통해 당시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은 편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쉼보르스카는 자신이 동료 문인들만큼 전쟁의 체험을 생생하게 그려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실감했기 때문이라고 생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시인은 결코 침묵했던 것이 아님을, 다만 전쟁의 비극 앞에 자신의 언어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을 뿐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쓰기를 멈출 수 없었음을, 이 시집에 담긴 목소리들은 들려준다. 훗날 저승에서 다시 만난 시인이 왜 본인의 허락 없이 시들을 세상에 꺼내 보였냐며 타박한다면 대꾸할 변명은 그것 뿐일 것이다. 그 목소리의 웅얼거림이 멈추지 않았노라고.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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