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진의 연기는 베테랑 매니저조차 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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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예진의 연기는 베테랑 매니저조차 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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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7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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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영화 '무방비도시'에서 소매치기 백장미를 연기한 손예진. 손예진의 연기력이 도드라진 영화 중 하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2010년 생일날 김민숙 엠에스팀엔터테인먼트 대표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회사의 간판이라 할 배우 손예진의 연락을 받으면서부터다. “저에게 할 말 없으세요” “오늘 좀 만나죠”라는 말에는 서운함과 냉기가 가득했다. 김 대표에게는 켕기는 일이 있었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2008) 등으로 떠오른 별이었던 배우 문채원 영입 작업을 막 끝냈는데, 손예진에게는 언급을 한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질투와 시기의 동물. 김 대표 머리에는 ‘혹시’라는 단어가 스쳤다.

김 대표는 손예진이 정한 장소로 향했다. 부리나케 간 곳에는 부르지도 않은 문채원이 손예진과 함께 냉랭한 표정으로 서로를 외면하며 앉아있었다. ‘벌써 일이 벌어졌구나’라는 생각에 김 대표는 아찔했다. 다급하게 자리에 앉아 ‘사태’를 해결하려는데, 두 배우가 갑자기 “생일 축하”를 외쳤다. 손예진이 김 대표를 위해 마련한 깜짝 쇼였다. 김 대표는 국내 1세대 매니저로 꼽히는 베테랑이다. “연기하고 싶다”고 불쑥 찾아온 고교 2학년 손언진을 “공부 더 하고 1년 후 다시 오라”며 돌려보냈다가 이후 손예진으로 데뷔시켜 빅스타로 키웠다. 그런 김 대표조차 손예진의 연기에 속아넘어갔다. 영민하면서도 유쾌한 손예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손예진은 어떤 하나의 수식으로 단정 짓기 힘든 배우다. 활동 초창기엔 ‘멜로의 여왕’이라는 말이 따랐으나 지금은 딱히 어울리지 않는다. 연애 고수(영화 ‘작업의 정석’)에서 재벌 상속녀(드라마 ‘사랑의 불시착’)까지 연기 폭이 넓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영화 ‘무방비도시’(2008)를 떠올려보자. 손예진은 냉혹하고도 솜씨 좋은 소매치기 백장미 역을 맡았다. 불량한 눈빛에 살기가 번득인다. 달콤하거나 순정하거나 애수 어린 사랑을 표현해내던 손예진을 단번에 지웠다.

'아내가 결혼했다'의 손예진. 남편에게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번 더 하게 해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일부 남성 관객이 “공상과학 영화 아니냐”며 힐난했던 ‘아내가 결혼했다’(2008)는 또 어떤가. 손예진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남편 덕훈(고 김주혁)에게 새로 사랑하게 된 남자와 결혼을 한번 더 하게 해달라고 조르는 인물 인아를 연기했다. 터무니없는 요구에 덕훈도 관객도 기겁을 하지만 “내가 별을 따달래, 달을 따달래, 그냥 남편 하나 더 갖겠다는 것뿐인데”라는 인아의 말은 손예진의 연기를 통해 묘하게 설득력을 얻는다. 손예진의 ‘반달 눈웃음’과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관객은 무장해제된다.

‘비밀은 없다’(2016)에서도 손예진의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고교생 아이를 잃은 여인 연홍으로 변신했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가족까지 버릴 수 있는 남편 종찬(고 김주혁)에 맞서 진실을 찾아가는 주체적인 역할이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은 손예진이 액션 연기 역시 가능함을 보여준 영화였다.

영화 '비밀은 없다'. 손예진은 출세에 눈이 먼 위선적인 남편에 맞선 여인 연홍을 연기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손예진은 책 읽기를 좋아한다. 예전 인터뷰로 만났을 때 “서울 시내 대형 문고에 한번 가면 책 수십 권을 산다”고 말했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상상해내고 표현하는데 독서만큼 좋은 훈련도구는 없다.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매번 소화해내는 연기력의 비결은 왕성한 독서라고 생각한다.

작품에 대한 몰입 역시 강점이다. 경기 파주시에서 영화 ‘협상’(2019)을 촬영했을 때 손예진은 촬영장 인근 펜션에 머물렀다. 집을 오가는 시간을 아껴 연기에 집중하고 싶다는 바람에서다. ‘협상’을 제작한 길영민 JK필름 대표는 “배우들은 보통 촬영장이 수도권이면 출퇴근하며 연기한다”며 “손예진은 스타일리스트 등 스태프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공간이면 된다면서 숙소를 부탁했다”고 말했다. 길 대표는 “손예진이 숙소에서 추리닝 입고 생활하다 자기 촬영이 없을 때 현장에 놀러 오곤 했다”며 “팀의 일원이 되고자 하고, 작품에 자신의 모든 걸 다 쏟는 배우라는 인상이 강했다”고 덧붙였다.

손예진은 영화 '협상'에서 인질범과 협상에 나선 경찰 하채윤을 연기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능동적인 면은 연기에서도 드러난다. 손예진은 촬영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협상’의 이종석 감독은 “배우들이 다 모여 시나리오 읽기를 할 때에도 제안을 많이 해 시나리오 회의처럼 느껴졌다”며 “공동 각색으로 이름을 올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고 했다. 이 감독은 손예진을 “촬영장에 준비를 많이 해오면서도 감독의 요구를 즉석에서 잘 반영하는 배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손예진의 다음 작품은 할리우드 영화 ‘크로스’다. ‘비포 선라이즈’(1995)의 이선 호크와 ‘아바타’(2009)의 샘 워딩턴이 연기 호흡을 맞춘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촬영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국의 배우들과 어떤 연기 앙상블을 빚어낼까. 손예진은 매번 궁금증을 유발하는 배우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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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의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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