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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아홉 시의 응급실

입력
2021.02.14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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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에 있는 음식점은 한동안 저녁 아홉 시까지만 영업했다. 밥을 먹거나 술을 마셔도 이 시각이 되면 예외 없이 매장 밖으로 나가야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정해진 시각이다. 다만 아홉 시가 정확히 과학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구도 논문으로 입증해본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험상 아홉 시는 대단히 유효한 시각이다. 한국 문화에서 절묘하게 밥을 먹기는 충분하지만 술을 마시기에는 불충분하다. 아무리 일찍 서둘러 저녁을 먹기 시작해도 여섯 시 이전에는 어렵다. 착석하자마자 급하게 식사에 반주를 곁들여도 마무리되면 얼추 여덟 시를 넘긴다. 자리를 옮기기에 시간은 부족하다. 술을 마시고자 한다면 그 자리에서 아홉 시까지 마시다가 얌전히 귀가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저녁을 바깥에서 먹을 수 있게 용인하지만 돌아다니기는 어려운 시각이 아홉 시다. 물론 입가심 맥주 한 잔이 절실할 때가 있다. 하지만 전염병의 확산 방지를 위해선 사람들의 이동을 줄여야 한다. 아홉 시에 거리로 나오면 비슷한 처지의 많은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어 귀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두가 갈 곳이 없기에 집으로 돌아간다. 방역에선 나름대로 효과적인 것 같다.

나는 병원 밖에서는 얌전하게 아홉시까지 술을 마시고 출근하면 의료진이 된다. 응급실 근무는 순식간에 흘러간다.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는 응급실에서 취객은 주요 환자군이다. 사람들은 맨정신에서 멀어질수록 몸이 아플 일이 많다. 몸을 가누지 못해 다치거나 속에서 탈이 나기도 한다. 오래도록 술을 마셔 건강을 해친 사람도 있고 좋지 않은 시도를 하는 사람도 있다. 허나 응급실을 방문하는 취객의 대다수는 넘어져 얼굴을 다치거나 손을 베이거나 발목을 접질린 사람들이다.

취객은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세상에는 아침 술이나 점심 술을 마시는 사람도 많다. 황혼에서 새벽까지야말로 그들은 응급실의 단골손님이다. 그리고 팬데믹이 찾아 왔다. 일단 사람들은 바깥 생활을 자제했다. 집에서 소수의 사람과 마시면 바깥에서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것보다 과음이 줄어든다. 자연스럽게 응급실에 방문하는 취객은 줄었다. 그리고 식당마저 아홉 시에 문을 닫기 시작했다.

어느덧 응급실에는 프라임 타임이 생겼다. 시각은 대략 아홉 시 이십 분부터 열 시까지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홉 시까지만 술을 마셔야 한다. 또 정해진 시간 이후에도 한껏 취기를 누려야 한다. 끝이 다가올수록 그들의 마음은 급해진다. 삼십 분쯤 남으면 마지막 스퍼트다. 그것이 오늘 어떤 사고를 일으킬지도 모른 채, 무리하게 주문한 술을 억지로 제 몸에 욱여넣는다. 쫓겨나듯 거리로 나오니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결국 넘어지거나 부딪힌 그들의 종착지는 응급실이다.

그래서 응급실 노동자의 시계는 이렇게 간다. 평화로운 일터가 갑자기 사십 대에서 육십 대 남성들로 채워진다. 나는 아, 그 시간이 왔구나 생각한다. 명명하자면 '코로나 때문에 술을 몰아 마신 중년 남성들의 시간'이다. 피 흘리는 사람들이 몰려와 술에 취한 큰 동작으로 어딘가 통화하거나 의료진을 찾으며 응급실에서 북적이는 시각. 오늘부터 그 시각은 한 시간 늦춰질 것이다. 이들을 한꺼번에 마주하는 번다함과는 별개로, 이 또한 시대에 적응해나가는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한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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