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이후 1000건 이상 법안 미리 봐
이해충돌 소지 다분... 월권 논란 직면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오래 전 민주주의를 확립한 영국 왕실의 지위를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부쩍 ‘월권’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사유재산 공개를 막기 위해 내각에 압박성 로비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 하루 만에 1,000건이 넘는 법안을 ‘사전 검열’했다는 의혹이 터져 나왔다. 왕실은 오랜 관습이라 주장하지만, 대상 법안이 관행을 벗어났다는 주장이 좀 더 설득력을 얻는 편이다. 일부는 왕가 사익(私益)과도 연관돼 도덕성 비판까지 불거질 조짐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8일(현지시간) 여왕이 1952년 즉위 이후 ‘동의권’ 행사를 통해 의회보다 먼저 들여다본 법안이 1,062건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가장 최근인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거래 내용부터 사회 보장ㆍ연금제, 식품 정책, 동물 복지에 이르기까지 분야도 다양했다. 여왕은 1963년 대영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의 법적 분리, 1986년 불법 연어잡이를 막는 연어법 제정, 2019년 주차 요금 책정 법안 등 왕실 권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법안에도 동의권을 행사했다. 가디언은 “사전 검사 법안들 가운데는 부동산, 주택처럼 개인 자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법도 포함됐다”며 “동의권 행사 취지를 분명히 넘어선 것”이라고 지적했다.
왕실 측은 “여왕 동의권은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전통이고, 정당한 입법 절차 중 하나”라며 즉각 반박했다. 그러나 전통 범위에 포함될 수 없다는 법안도 다수 있다는 게 비판론자들의 판단이다. 가령 여왕은 2013년 런던과 버밍엄 간 고속철도를 부설하는 법안에 동의권을 행사했다. 당시 교통장관은 철도를 완성하려면 왕실 소유의 부동산 21건을 수용해야 해 왕실 이익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여왕의 동의를 요청했다. 동의권 행사 자체가 이해충돌로 연결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지 법률 전문가들도 동의권 남용 가능성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로버트 블랙번 킹스칼리지런던대 헌법 교수는 “군주가 잘못된 사상을 갖고 있기라도 하면 자기 뜻대로 법을 좌지우지할, 잠재적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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