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이는 버스에서 모자를 쓴 한 젊은 남자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리고 있다. 두 시간 후 생라자르역 앞 로마광장 앞에서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난다. 그의 친구는 외투 앞섶을 가리키며 단추를 하나 더 다는 게 낫겠다고 말한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이자 언어학자, 수학자, 번역가, 소설가 겸 시인이었던 레몽 크노가 1947년 발표한 연작 ‘문체 연습’의 간략한 줄거리다. 크노는 반 페이지 남짓한 이 단순한 일화를 바흐의 푸가기법에 착안해 무려 99가지의 다른 문체로 변주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문체에 따라 얼마나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실험한 이 작품은 이후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다.
전세계 34개국 언어로 번역되며 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지만 그간 한국에는 소개되지 못했었다. 그러다 조재룡 고려대 불문과 교수의 번역으로 지난해 11월 국내 초역됐는데, 출간 3개월이 막 지난 현재 벌써 4쇄를 찍었다. 국내에선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해외 작가의, 70여년전 쓰여진, 그것도 실험문학 작품이 일으킨 소소한 돌풍이다.
책을 출간한 문학동네 관계자 역시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라고 설명했다. 책임 편집을 맡은 송지선 편집자는 “워낙 상징적인 작품이라 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깜짝 인기에는 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문학가들의 입소문이 한몫 했다. 구병모 소설가, 금정연 서평가, 김민정 시인, 문보영 시인, 송승환 시인, 오은 시인, 이제니 시인, 장석주 시인, 정영수 소설가 등이 책의 후기를 앞다퉈 SNS에 올리면서 독자들 사이에 책에 대한 궁금증이 퍼졌다. 인스타그램에는 책 사진을 인증한 독자들의 게시글만 100여개에 달한다.
문체 연습
- 레몽 크노 지음
-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발행
책을 번역한 조재룡 교수는 “레몽 크노가 ‘작가들의 작가’이긴 하지만, ‘문체 연습’은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형식 실험을 목적으로 하는 여타의 작품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짧고 쉽기 때문에 색다른 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번역가 입장에서도 ‘문체 연습’은 번역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준 작품이다. 희곡, 노래 등 장르를 넘나들 뿐 아니라 동물계, 식물계, 수학 기하학, 철학용어, 북한어 등 말 그대로 ‘온갖 버전’으로 쓰여진 만큼 사실상 재창작이나 다름 없었다. 책 분량의 절반을 ‘해제’로 채운 이유다. 조 교수는 “번역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인 만큼 더욱 많은 독자들이 문체의 무한한 가능성을 즐겨보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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