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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끼니 없으면 서운한 '김치', 매 끼니는 부담되는 '기무치'

입력
2021.02.03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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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김치와 ‘기무치’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수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현지 대학에 재직 중인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일본 대형 마켓의 김치 전문 코너. ‘본고장 한국의 맛’을 자랑하는 제품도 인기지만, 매운 맛과 양념을 줄인 일본풍 ‘기무치’를 선호하는 소비자도 적지 않다. 일러스트 김일영

일본 대형 마켓의 김치 전문 코너. ‘본고장 한국의 맛’을 자랑하는 제품도 인기지만, 매운 맛과 양념을 줄인 일본풍 ‘기무치’를 선호하는 소비자도 적지 않다. 일러스트 김일영


◇일본에서 사랑받는 김치

일본에서 김치는 쉽게 구할 수 있다. 집 앞 편의점에서 한 끼 분량으로 소분한 김치 팩도 팔고, 대형 마켓에 가면 김치 코너가 꽤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어서 종류별로 고를 수도 있다. 한국의 마트에서 킬로그램으로 판매되는 대용량 김치와 비교하자면 ‘애걔걔’ 소리가 나오는 소량 포장이고 가격은 다소 비싸지만, 그래도 김치는 일본에서 상당히 대중적인 먹을거리로 자리잡았다. 한식을 표방하지 않는 ‘이자카야’ (居酒屋, 주류와 안주류를 주로 제공하는 일본식 술집을 뜻한다) 중에도 김치를 주문할 수 있는 가게가 적지 않다.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김치찌개나 김치볶음밥 등 김치가 주연인 요리가 인기를 끌고 있고, 새로운 취향에 발맞추어 김치를 활용한 퓨전 메뉴도 다양해지는 중이다. 라멘 위에 김치 고명이 올라가고, 일본식 전골 요리인 ‘나베’에도 김치가 들어간다. 일본식 부침개인 ‘오코노미야키’의 속재료로도 김치는 인기 아이템이다. 세계 어디를 가나 한식을 접할 수 있는 요즈음, 김치의 인지도와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부쩍 실감한다. 그 중에서도 일본은 김치의 맛을 즐길 줄 알 뿐 아니라,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하는 나라일 것이다.

◇김치라는 음식보다, 김치를 즐기는 식문화에 주목

고춧가루, 파, 마늘로 양념하고 젓갈로 감칠 맛을 낸 김치는 한국 요리의 문화적 정체성이다. 최근 중국에서 ‘파오차이’라는 음식이 김치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해프닝이 있었는데, 채소를 소금에 절이는 레시피만 보면 과연 유사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양배추를 염장하고 가볍게 발효시킨 독일의 ‘자우어크라우트’도 김치의 먼 친척 뻘이다. 일본에도 채소를 소금에 절여 수분을 빼고 가미하는 ‘츠케모노(漬物’라는 절임 음식이 있는데, 게 중에는 젖산 발효를 충분히 시켜 김치와 비슷한 감칠 맛을 내는 종류가 있다. 식재료나 레시피만 놓고 따지면 세계 곳곳에 유사한 먹을거리가 한둘이 아닌 것이다. 붉은 고춧가루의 매콤한 감칠 맛이야말로 김치의 상징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전래된 고추는 한식 식재료로서 역사가 짧으니 김치의 역사적 고유성을 입증할 증거로 들이밀기에는 멋쩍다. 사실 김치는 삼계탕이나 불고기처럼 식재료와 레시피가 특정된 음식이 아니다. 배추김치, 깍두기, 오이소박이, 동치미 등 김치가 되는 채소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한국에서는 이른 겨울에 가족이 모여 김치를 담는 ‘김장’ 풍습이 아직 건재한데, 그만큼 지역마다 집집마다 맛의 지향점도 다르다. 말하자면 김치는 ‘채소를 염장, 발효시킨 보존식’의 통칭이지, 특정한 식재료와 맛을 재현하는 단일 음식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김치를 두고 언제 어디에서 시작된 음식이냐 따지려는 시도 자체가 얄궂고 한편으로는 무모하다.

한국인에게 김치는 매 끼니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부식이다. 어찌 보면 밥보다도 김치다. 밥은 면으로 대신할 수 있지만, 김치를 대체할 음식은 도통 찾기 어렵다. 인스턴트 라면을 끓여도, 짜장면이나 돈까스를 먹어도, 우아하게 스파게티를 즐길 때에도 어김없이 김치가 생각난다. 아무렴 해외로 신혼 여행을 가면서도 김치 팩을 챙기는 토종 한국인을 여럿 보았다. 샐러드나 피클 등으로는 김치의 산뜻한 감칠 맛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관련 비즈니스 규모도 남다르다. 일본처럼 소분 포장이 아니라, 잘 익은 배추 김치를 통째로 살 수 있다. 김장철에는 소금에 절인 배추만 배달하는 서비스도 성황이다. 사시사철 김치를 맛있게 먹기 위한 김치냉장고가 집집마다 구비되어 있을 정도니 한식 상차림에서 김치의 존재감은 말이 필요없다. 사실 김치가 한식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유는, 김치라는 음식의 고유성 때문이라기 보다는, 식문화에 있어서 김치가 차지하는 이런 강렬한 존재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사랑받는 부식으로 정착되었다고는 해도 일본에서 김치는 기호 음식이다. 마늘이나 생강 등 향이 강한 양념이 들어가기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고, 매 끼니 먹기에는 부담스럽다는 인상도 있다. 덕분에 김치가 유료 메뉴라는 인식도 문제없이 성립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돈을 받아야 김치를 내놓겠다는 식당은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식에서 있어서 김치는 수저나 물처럼 상차림의 기본이므로, 김치에 박하게 구는 것은 한식당으로서 접대의 기본을 못 갖춘 꼴이 되는 것이다. 한국인이 짜장면에는 단무지와 양파를 곁들이듯, 일본에서는 ‘야끼니꾸’(?き肉、한국식으로 불에 구운 고기)를 먹으러 가면 김치를 시켜야 제맛이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단무지와 양파가 한식 밥상에 늘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일본인에게 김치도 한국 음식이라는 이국적 메뉴에 한정된 부식인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 김치는 일식과 다양한 방식으로 섞이면서 독특한 식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주당들은 김치를 가벼운 안주로 삼기도 하고, 앞서 소개한 것처럼 김치를 곁들인 일품 요리가 점점 늘고 있다. 일식과 잘 어울리는 맛을 찾다보니, 김치맛의 지향점도 조금 다르다. 한국의 김치는 젓갈류를 곁들여 풍미를 돕고, 발효 과정에서 살아나는 채소의 식감을 중시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양념을 적게 써서 특유의 냄새를 억제한 가벼운 맛을 선호한다. 본고장 감각에서 보자면 겉절이에 가까워 제대로 된 김치라기에는 여물지 않은 맛이지만, 일본인의 입맛에는 이 역시 꽤 즐길만한 음식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된다고 하듯, 김치가 현해탄을 건너 ‘기무치’의 식문화를 새로이 개척하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

◇자본의 힘으로 움직이는 음식 문화

문화 인류학자의 눈에는 먹을거리의 오리지널 논쟁처럼 소모적인 것이 없다. 음식 문화의 본질은 이동성과 변화에 있지, ‘원조’라는 오래된 고정 관념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나고 싸우고 화해하고 이별하는 로맨스 영화 속 젊은 연인처럼, 음식은 숙명처럼 국경을 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변화를 겪는다. 과거에는 제국주의나 전쟁 등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과정 속에서 식문화가 전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식문화는 ‘문화 상품’의 형태로 이동한다. 전세계의 식재료가 국경을 넘어 소비되고, 먼 대륙의 음식이 동네 레스토랑에서 인기를 끈다. 이국의 식문화가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고, 기발한 레시피는 이국적 식욕을 부추긴다. 국제적으로 상품과 컨텐츠를 유통시키는 자본의 논리를 무시해서는 음식 문화의 이동성을 논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먹을거리에 대한 오리지널 논쟁이 빈발하는 것도 음식이라는 문화 상품의 가치를 염두에 둔 자본의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 ‘원조’ 라는 배타적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글로벌 시장에서 상품의 가치를 높이려는 상업적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파스타가 이탈리아 요리라는 것은 상식이지만, 파스타의 원형인 면 요리는 중국이나 아랍권에서 먼저 발견된다. 스파게티 소스의 대표적인 식재료 토마토는 제국주의 시대에 남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래된 외래 채소였다. 이런 재미없는 ‘팩트’를 갖고 파스타의 역사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아니다를 논하는 것은 세상 지루하다. 명란젓 스파게티, 김치 그라탕 등 퓨전 파스타가 기세등등해도 파스타의 정수는 이탈리아에서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다. 이탈리아만큼 정열적으로 파스타를 사랑하고 다양하게 즐기는 곳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김치도 마찬가지다. 한식처럼 아낌없이 김치에 헌신하고, 전투적으로 김치에 정성을 기울여 온 음식 문화가 또 있겠는가. 맛있는 김치가 궁금한 사람은 한반도로 가야 한다는 점에는 한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경화 칸다외국어대 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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